용봉산과 용봉사, 마애석불을 지키고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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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산과 용봉사, 마애석불을 지키고 있는 마을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3.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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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마을을 읽다<4> - 홍북면 신경리 신리마을
용봉산의 품에 안긴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조성 이전의 홍북면 신경리 신리마을 전경.

용봉산, 차령산맥 지맥 산세 용의 모습에 봉황의 머리 닮아
홍성 8경의 하나, 충남도청 내포신도시 품에 안고 있는 진산
용봉사, 백제 말에 창건 추정 고려시대 승려 수만 1000여명
799년 작 용봉사미륵불, 마애여래입상·영산회괘불탱화 유물

 

충남도청내포신도시 조성으로 편입된 홍북면 신경리의 자경동·신리·주촌마을 중에서 비교적 원형이 가장 많이 남은 마을이라면 신리마을이다. 용봉산의 품에 안긴 마을로 지역과 마을을 대표하는 용봉산과 용봉사, 신경리 마애석불이 그대로 보존돼 옛 정취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천의 오서산과 함께 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제2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봉산은 홍성에서 덕산으로 이어지는 지방도 609호선을 따라 서쪽으로 길게 누에모양을 한 바위산이다.

과거에는 산 전체에 바위가 드러나 있는 형태였으나 지금은 소나무를 비롯한 잡목이 비교적 잘 어우러져 있는 산이다.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작고 아담한 바위산인 용봉산(龍鳳山, 381m)이 있다. 충청도를 가르는 차령산맥의 지맥으로서 가야산의 한 줄기인 용봉산은 산세가 용의 모습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시대에는 차령 너머 충청도 서북쪽 최대도시인 홍주(洪州)의 북쪽 진산이어서 ‘북산(北山)’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는 8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팔봉산(八峰山)’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의 기맥을 끊기 위해 산의 정상이 있는 홍성군 홍북면에 용봉사라는 절이 있어 홍성군 지역을 용봉산, 예산군 덕산면 쪽에 수암사(秀岩寺)라는 절이 있다고 해 수암산(260m)이라고 각각 부르기로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봉산은 381m의 아담하고 야트막한 산에 옹골차게 들어선 각종 바위로 인기 많은 산이다. 용봉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위. 바위산이면 하나씩 있다는 흔들바위는 기본이요, 세 겹의 병풍으로 둘러쳐있는 병풍바위, 용봉산 오면 꼭 한 번 타보고 간다는 물개바위, 행운을 점치는 행운바위와 실제 두꺼비를 보는 듯 똑 닮은 두꺼비바위에 삽살개바위까지. 이렇게 알찬 바위구경이 또 있을까.

이렇듯 용봉산에는 최영장군 활터를 지나 정상에 이르면 노적봉과 악귀봉, 병풍바위 등 사람들은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용봉산을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바위산이라 산세가 화려한데 지금은 충남도청내포신도시를 가슴으로 감싸 안고 있으며, 해질녁 서쪽을 바라보면 서해의 낙조가 일품이고, 동쪽으로는 홍북과 예산의 삽교평야가 드넓게 펼쳐지면서 장항선 철도로 달리는 기적소리가 명랑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신경리의 마애여래입상.


■용봉산, 작은 금강산으로 불려
그래서인지 다산시문집 2권에 다산 정약용이 용봉산을 찾았을 때 ‘용봉사에 들러(過龍鳳寺)’라는 시를 남겼다. ‘서해의 지역이라 명산은 적고/ 기름진 넓은 들만 깔리었는데/ 뜻밖에도 본질을 탈바꿈하여/ 머리 빗고 몸 씻어 평지에 나와/ 뭇 봉우리 드높이 솟았으니/ 가팔라 투박한 살 털어버렸네/ 가녀린 꼴 금세 곧 소멸할 것 같은데/ 험난하여 또다시 삼엄한 느낌/ 놀란 기럭 고개를 높이 쳐들고/ 별난 귀신 엿보다 도로 엎드려/ 아첨하는 간신은 참소 올리고/ 경망한 아녀자가 독기 품은 듯/ 생김새 그야말로 특이하구나’

서해안의 특징을 꿰뚫고 있던 정약용은 단번에 용봉산의 비범함을 알아본 것이다. 단순히 산세의 화려함에 매료돼 칭찬하지는 않았으며, 묘한 수려함을 독특한 비유로 풀어내면서 자신의 처지를 풍자하고 있다. 정약용은 1795년 정3품의 동부승지에 올랐다가 ‘주문모입국사건’으로 종6품인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됐다. 찰방은 지금의 역장과 비슷하니, 슬픔에 잠겨 용봉산에 들렀던 셈일 터이다.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한 용봉산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산 전체가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산세가 수려하다. 옹골찬 산세와 풍경이 여느 명산에 못지않아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용봉사, 덕숭산 수덕사의 말사
용봉산에는 고려시대 승려 숫자가 1000여 명에 달했다는 용봉사(龍鳳寺)가 병풍바위를 등지고 앉아 있다. 백제 말에 창건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용봉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봉사가 팔봉산에 있다고 기록돼 있으며, 청송사 또는 영봉사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존하는 사찰은 1906년에 새로 세운 것이라고 전해진다. 18세기 후반 무렵 폐사됐으나 1980년 무렵에 중창됐고, 1982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1988년에는 축대를 완성하고, 이후에 극락전·산신각 등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용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 돼 있다.

본래의 용봉사는 지금 절의 서쪽으로 조금 높은 곳에 있었는데, 이곳이 명당임을 알고 조선 후기인 1906년 평양조씨(平壤趙氏)의 가문에서 조상의 묘를 만들기 위해 해체하고,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용봉산 남쪽 기슭에 통일신라 39대 소성왕 원년(799)에 지은 사찰이라고 하는 용봉사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오래 전부터 산의 이름도 용봉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주민들과 신도들이 본래의 위치에서 약간 동쪽 아래로 옮긴 용봉사에는 조선 숙종 때 제작된 ‘영산회괘불탱화’(보물 1262호)가 보관돼 있다. 이 괘불은 조선 숙종 16년(1690) 5월에 제작된 화사 진간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영조1년(1725년) 3월에 괘불을 중수하면서 불화 하단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내용을 적고 영조대왕을 찬양했다. 이 탱화는 숙종대왕이 왕자 균(=宗)을 낳았는데 요절하자 사찰에 명을 내려 ‘거대한 탱화를 그려 죽은 아들의 명복을 기원케 하라’고 해 숙종 16년에 화사를 파견하여 그리게 했다고 한다. 괘불의 크기는 563×550㎝이다.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불을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 또한 용봉사 입구 서쪽바위에 새긴 2m여 크기의 마애불이 있는데, 불상의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 있게 표현했다. 눈과 입은 얼굴에 비해 가늘지만 흐뭇한 미소가 번져 있어 8세기 신라 불상의 이상적인 얼굴 특징이 많이 남아 있다. 귀는 거의 어깨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와 있으며, 목에는 3줄의 삼도(三道)가 있다. 불상의 왼쪽에 신라 소성왕 1년(799)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 가치를 더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다.


■마애여래입상, 노색시 바위라고도 불려
용봉사에서 북쪽 능선으로 100m쯤 올라가면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높이 4m가량의 신경리 마애여래입상(보물 제355호)이 있다. 높이 4m, 폭 1.4m 내외인 자연암석의 앞면을 파서 부조(浮彫)한 여래입상으로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다. 수인(手印)을 보면 다른 지역 불상과 달리 오른손을 쭉 펴서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굽혀 들었다. 불상의 상호(相好: 얼굴)는 마모가 심하지만, 높고 둥근 형태의 육계(정수리 위에 솟아나온 부분)와 소발(素髮: 머리카락이 표현되지 않는 것)의 머리카락, 미간(眉間)의 백호(白毫: 원래 흰 털을 뜻하지만, 후대에 보석 등으로 대체됨) 구멍, 반원을 그리고 있는 눈썹, 가늘게 뜬 눈, 오뚝한 코, 살짝 다문 입, 어깨까지 닿아 있는 긴 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 부분도 마모가 심하여 삼도(三道: 세 개의 선)의 표현이 선명하진 않다.

마애여래입상은 오른손을 오른쪽 무릎까지 내려뜨려 법의(法衣: 불상의 옷) 자락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겨드랑이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보통 시무외인(施無畏印: ‘두려워하지 마라’는 뜻의 손 자세)을 결한 불상들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상례인데, 이 불상은 왼손을 들어 올리고 있고, 오른손으로 법의 자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법인(說法印: 설법하는 손 자세)을 결한 듯하다.

이렇듯 용봉사에는 흘러온 세월만큼이나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신리마을에 있는 용봉산은 계곡이 깊거나 산세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넓고 평평한 평야지대에서 불쑥 솟아오른 누에형상의 바위산으로 이뤄져 더 우람하게 보인다는 것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평이다. 용봉산은 또 평지에 불쑥 솟아오른 화강암지대여서 이름난 홍성온천과 덕산온천이 분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바위산이 특징인 용봉산은 봄이면 마치 수석(壽石) 전시장처럼 아기자기한 바위 사이로 피어난 온갖 꽃들이 어우러져 절경이고, 여름철에 잠시 폭우라도 쏟아지면 삽시간에 온 산이 폭포를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다.

가을철에는 빛깔 고운 단풍이 등산객을 유혹하는데, 특히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전설을 간직한 기암들이 많은 능선을 걸을 때 바라보이는 동쪽의 홍성, 예산 들녘은 물론 서쪽의 수덕사, 가야산까지 조망되는 시원한 풍경이 일품이다. 용봉산 ‘홍성 8경’의 하나이며, 충남도청내포신도시를 품에 안고 있는 충청의 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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