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와 맞선 센난 한국인 석면피해자들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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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와 맞선 센난 한국인 석면피해자들의 절규
  • 취재=한기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0.1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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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아시아 최대 석면광산 충남, 안전지대일까? 〈7〉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의 폐쇄된 석면공장 창틀사이로 석면포대자루가 지금까지 방치돼 있다.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의 폐쇄된 석면공장 창틀사이로 석면포대자루가 지금까지 방치돼 있다.

석면은 ‘기적의 광물’이라는 칭송에서 ‘침묵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얻기까지 중요 산업용 광물로 이용되다가 인체 유해성이 알려지면서 산업재해 물질, 환경오염 물질로 인식되고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한 한반도 강제 합병으로부터 최근까지 한일 관계 100여년의 역사 곳곳에서 석면문제를 찾아볼 수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 물자인 석면을 한반도 곳곳의 석면광산 개발을 통해 조달했던 것이다.

석면은 열전달을 차단하는 단열성, 불에 타지 않는 내화성, 산에 부식되지 않는 성질을 특징으로 한다. 매우 가볍고 광산개발을 통해 많은 양을 저렴하게 얻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군함, 전투기, 탱크의 엔진 부위 등에서 단열재 내화재로 석면은 필수였다. 따라서 일본으로 징용된 한국인 수십만 명은 일본 전역의 광산을 비롯해 오사카 일대의 군수 산업에 동원됐는데, 일본 오사카의 센난과 한난지역 석면공장에 동원됐던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 해방을 맞은 징용 한국인 가운데 일부는 일본에 남았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석면마을인 센난과 한난의 석면공장에서 일했던 것이다. 이는 일본사회에서 재일 한국인 차별과 냉대의 결과이기도 했다. 일본의 석면 산업은 군수 산업으로서 1950년대 한국전쟁과 196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에 전쟁 특수를 누렸지만 노동자들의 석면피해를 막기 위한 조치는 전무하다시피 소홀했던 것이다.

일본 오사카 센난·한난 석면방직공장, 재일 한국인들 일해
재일 한국인 10여명 등 석면 피해자 59명 국가배상 승소해
일본 센난·한난지역 1900년대 초부터 석면공장 많이 생겨
재일 한국인들 일제가 뿌린 석면재앙 온 몸으로 안고 살아

■재일동포들 석면공장서 일하며 생계 이어
일본 오사카 센난의 인구는 6만 8000명, 한난은 5만 5000명이다. 센난·한난지역 석면방직업은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난 2005년 6월 구보타 쇼크 직후 문을 닫았다. 구보타 쇼크의 여파는 곧바로 센난·한난지역에 몰아쳤다. 지역언론 매체와 센난시의회 의원과 지역공동체 활동가 등이 앞장서 센난석면방직공장의 문제와 실태를 드러내고 피해자들과 유가족을 한데 묶어내는 작업을 벌였다.

센난석면피해시민모임은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재일 한국인이 10여명이 포함된 석면 피해자 59명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했다. 9년 만인 지난 2014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대부분 승소했다. 일본법원이 석면 피해자에 대한 국가책임을 인정하면서 1971년 이전, 즉 일본 정부가 석면공장에 배기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기 이전 석면에 노출된 노동자로 한정했다는 아쉬움은 지금도 한구석에 남는다. 하지만 이는 직업성 피해든, 환경피해든 그리고 석면뿐만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를 비롯한 다양한 화학물질과 발암물질 피해에 대해 ‘나 몰라’하는 한국 정부와 기업의 행태는 일본의 재판부와는 판이하다는 점에 주목된다.
 

간호사 생활을 하던 재일교포2세 오카다 요코 씨는 1987년에 흉막비후 진단을 받은 이후 2005년 석면폐 진단을 받았다. 결국 병원에 휴직계를 낸 그녀는 호흡 곤란 증세가 더 나빠져 장애 1급이 됐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산소 호흡기를 착용하고 있다.

일본의 센난·한난지역은 1900년대 초부터 석면공장이 많이 생겼고 지난 2007년까지도 주변에 공장이 많이 남아 있었다. 100여 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석면 산업이 계속 발전해 왔고 1945년까지 군수물자, 전쟁을 위한 용도로 이용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 오사카의 센난·한난지역 재일 한국인들은 배운 게 석면방직 밖에 없어 때론 노동자로, 때론 영세 소규모 가내공장 자영업자로 일하면서 석면에 줄곧 노출됐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 석면광산에서 일했거나 광산 인근에 거주했던 많은 조선인들의 폐에는 죽음의 먼지가 가득 쌓였던 것이다.

하지만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죽는지 잘 모른 채 그냥 폐병, 암, 결핵 등으로만 알고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한국의 석면문제는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궤를 같이 한다.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홍성의 광천지역을 비롯해 일본 오사카의 센난·한난지역의 재일 한국인들이 일제가 뿌린 석면 재앙의 씨를 온 몸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일본 오사카의 센난지역의 재일 한국인들은 산소 호흡기를 끼고 산소통을 끌고 다니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갈 수 있는 곳을 모두 찾아다니며 석면의 위험성을 온몸으로 호소하고 있다. 당시 센난과 인근의 도시 한난에는 석면공장이 200여개가 넘었고, 다수의 재일동포가 석면공장에서 일했다. 일본인들이 ‘더러운 직업’이라며 꺼리는 일자리를 재일동포들이 채우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일본 센난지역 석면피해자들인 70~80대에 이른 재일 한국인들의 고통스런 목소리를 들어본다.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 재일교포 석면피해자들이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는 모습.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 재일교포 석면피해자들이 본지와 인터뷰 하고 있는 모습.

미/니/인/터/뷰 - 오카다 요코 씨

재일교포2세 오카다 요코 씨.

간호사 생활을 하던 재일교포2세인 오카다 요코는 1987년에 흉막비후 진단을 받았다. 이후 일본을 뒤흔든 석면 충격 구보타 쇼크가 터진 2005년에 석면폐 진단을 받았다. 결국 병원에 휴직계를 냈다. 다음해 그녀의 호흡 곤란 증세는 더 나빠져 장애 1급이 됐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산소 호흡기를 착용한 채 생활하고 있다.

석면폐는 진폐증의 일종으로 석면 섬유가 폐에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고 시간이 지나면서 딱딱하게 굳는 섬유화가 되면서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석면 질환이다. 오카다 요코의 아버지 오네야마 가즈오(한국명 강재희)씨는 군산 출신의 한국인이다.

강 씨는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에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과 결혼했으며, 규수 쪽에 있는 광산에서 일을 했다. 당시에는 석면에 대한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부모님은 공장에서 일하고 본인은 어린 시절 매일같이 공장에서 놀았다. 한국의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신 줄로 알았는데 살아 계셨다. 27살 때 처음으로 친척들이 살고 있는 한국에 가봤다.

-왜 한국인 재일교포가 많은가?
“1910년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섬유사업이 성업하고 있다. 섬유사업의 경우 일이 더럽고, 어렵고, 괴롭기 때문에 저임금 근무자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당시 경제적으로 어렵고 언어능력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단순노동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한국인 여성들이었다. 큐슈, 시코쿠 등을 비롯해 일본 서쪽 시골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오게 됐지만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들과 일본군에 인해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제일교포가 많다.”

-소송에 승리하면서 보상을 받았나?
“재판을 진행하던 시절에는 이미 공장은 없어진 후였기 때문에 석면사업을 실시함에 있어 그에 따른 위험성을 알려주지 않은 채 진행된 부분에 대한 책임이 일본정부에게 있다고 판단해 나라를 고소했고, 그 후 긴 기간동안 재판이 진행됐다. 보상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랐지만 700만 엔에서 많게는 1400만 엔까지 피해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오사카지역에 아직 석면슬레이트 지붕이 남아있던데?
“오사카에 아직 많은 석면슬레이트 지붕이 남아있다. 생활할 땐 전혀 피해가 없지만 해체시 발생되는 분진이 호흡기로 들어가게 되면서 피해가 발생한다. 하지만 해체업무를 진행하는 업체에서는 해체할 때 어떤 공해가 있고 그것이 얼마나 피해가 되는지 위험성을 감추고 있다. 정부에서 알게 되면 범칙금을 내게 될 수 있다.”
 


미/니/인/터/뷰 - 사토 씨

재일교포 사토 씨.

석면공장에서 32년간 근무했다. 10여 년 전 정부를 대상으로 재판을 실시했는데, 재판 도중 남편을 잃었다. 석면피해자였던 남편은 재판을 반대했다. 어려운 이 일을 통해 돈을 벌어 생활할 수 있었고, 아이들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지금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기 때문에 재판을 반대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사토 씨는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건강을 위해 재판을 하려고 했다. 결국 남편은 재판이 진행되던 중 석면폐로 인해 64세의 나이에 병마와 싸운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 억울해서 재판을 위해 싸웠지만 정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이번에 개최되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다큐멘터리 ‘일본 국가vs센난 석면 마을’ 속에 남편의 가장 힘들었던 모습이 담겨있는데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그 당시의 아픔이 크다. 지난 32년간 어려움을 겪었지만 10년간의 보상만 받게 됐다고 말했다.

-보상을 못 받는 상황이 흔한 일인가?
“국가에서 인정한 10년 동안의 기간 중 근무한 사람들에게만 보상이 이뤄졌고, 그 기간 외에 근무에 대해서는 전혀 보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짧은 기간 일했던 노동자들도 그 기간내에 근무했다면 모두 인정을 받았지만 정작 32년간 일했던 남편은 그에 맞은 보상을 받지 못했다. 30년이던 50년이던 인정받지 못했다. 관계자에게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직도 보상받지 못한 많은 피해자들이 호소하고 있다.”

-한국의 석면 피해자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피해자나 관계자들이 많은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나서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피해보상에 대한 활동을 할 때에도 열심히 살아왔던 과거를 당당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감추지 않고 얼굴과 이름을 밝히고 활동해야 더욱 효과가 있다.”
 


미/니/인/터/뷰 - 마츠시마 씨

재일교포 마츠시마(한고자) 씨.

한국에서 태어나 2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 ‘시마네’라는 곳에서 살았다. 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가 13살 때 재혼해 어머니를 따라 한난에 있는 니시카와 석면에서 스무 살까지 일했다.

그 시절에는 부모가 시집가라고 해서 18살 연상의 한국인과 결혼했다. 결혼 후 센난으로 왔다. 결혼 뒤 남편은 마츠시마가공소란 석면공장을 차렸다. 결혼 후에는 그 지긋지긋한 서석면 일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1988년까지 일해야만 했다.

이후 남편도 석면폐를 앓았다. 충분한 휴식과 꾸준한 검진 등을 통해 관리하며 살았다. 걸으면 호흡이 가쁘게 되고 폐활량이 일반인에 비해 매우 약해 폐기능 저하 등 증상이 나타난다. 만성능막염증을 앓고 있어 점막이 두꺼워져 석회화가 되며 결국은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마치 풍선을 처음 불 때에 느껴지는 답답함과 힘듦을 항상 느끼는 것과 흡사하다.

남편이 일을 하지 않아 네 번이나 이사를 했었다. 아이들을 위해 본인이 나가서 일을 하게 됐다. 남편과 헤어지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참으며 당시 3만엔 월세를 내고 살았다. 이제 와서야 행복해졌다. 어느 날 석면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시청에서 일을 하는 아들의 권유로 처음 검사를 받게 됐다. 석면 질환의 일종인 흉막플라크(흉막반) 진단을 받았다. 폐가 딱딱하게 굳어가니까 폐활량에 한계가 있다. 2005년부터 1년에 두 차례 정기 검진을 받고 있다.
 


미/니/인/터/뷰 - 마츠모토 씨

재일교포 마츠모토(윤경임) 씨.

할아버지와 부모님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전쟁 때 가족들은 다 돌아갔지만 어머니와 나는 일본에 남게 됐다. 

서로 이혼해 재혼한 부모 사이에서 혼란스런 환경에서 어렵게 자랐고,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석면피해에 대한 많은 정보를 듣게 됐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도 듣게 됐다. 그 당시에는 빈곤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다. 자급자족하며 살았고, 보모 일을 하기 위해 오사카에 왔다. 

결혼하고 남편이 일을 안 하니 생활이 힘들어 석면공장에서 일을 시작했고, 당시 1년 정도 일하면 집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일을 시작했다. 4번의 이사 끝에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석면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3만엔 아파트에서 월세로 생활했다. 남편과 이혼 후 글도 알지 못하고 기차 타는 줄도 몰라 40에 학교에 가서 글을 배웠다. 이제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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