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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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①
  • 김주호 <광천제일장학회 이사장>
  • 승인 2018.05.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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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이런 글을 쓰자니 부끄럽고 쑥스럽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불교 신자가 아니다. 거의 날마다 절에 가서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있지만 그건 등산(운동)을 하는 길목에 절(정암사)이 있어 누구 말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신심(信心)도 없이 참배(인사)드리는 것이어서 돌팔이 불교 신자라고 하는 표현이 맞다.

교직생활 40년간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교였다. 불교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왕 2년(불기 544년, 서기 372년) 이 땅에 최초로 들어와 큰 영향을 끼쳤다.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정치·경제·사상·문화·예술 등 일상생활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조금 아는 정도이지 부처님의 오묘한 가르침이나 불경과 사상에 대해 필자는 깊은 지식이 없다.

불교 신자라면 누구나 읊조리는 천수경 한 구절도 제대로 암송하지도 못한다. 물론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이나 자비는 두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선왕조에 들어와 불교가 핍박을 받으면서도 면면히 그 가르침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은 4부 대중의 순교자적 정신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겨울철 빼고는 한 달에 두 번꼴로 절에 갔다. 초·중·고 시절 봄가을 소풍은 으레 절로 갔다. 봄에는 산나물 뜯으러,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찾아서, 가을에는 단풍 구경하러 인근 절에 수도 없이 다니면서 기독교의 교회당 같은 곳이려니 생각했다.

필자가 퇴직하기 전에 학생들과 2박3일 일정으로 경주를 거쳐 돌아오는 길에 합천 해인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8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에 갔는데 관리하는 스님으로부터 의미있는 설명을 들었다. 6·25 때 합천지역 공비들이 산에 숨었다가 밤만 되면 양민들을 괴롭히자 미국 공군 전투단장이 해인사 일대를 포격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임무를 맡았던 한국공군 조종사 김영환 대위(훗날 장군으로 진급)가 군법에 의해 나를 처형시켜도 좋으니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8만대장경을 보호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마침내 그의 호소가 미군 비행단장의 마음을 움직여 포격 계획이 취소됐다고 한다. 그래서 귀중한 문화재가 살아 남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고려시대 후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강산이 폐허가 될 정도로 고초를 겪으면서도 부처님의 원력을 빌려 몽고족을 몰아내자는 불심 하나로 천신만고 끝에 제작된 8만1137판이 한 공군 조종사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보존된 것은 부처님의 은공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그 후 수업 시간에 우리나라 불교사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8만대장경이 제작된 과정과 고초를 겪으며 오늘날까지 보존된 내력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40년 교직생활을 마치고 매일 산에 올라 절에 들르게 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5년 전 봄 친구 김동춘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학생폭력에 연루되어 중도 퇴학을 당했던 천방지축 불량 청소년이었다. 필자도 그 친구로부터 작은 폭행을 당했다. 그런 문제아가 퇴학을 당하자 필자는 해방감을 느꼈을 정도로 안도할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다행히 군 복무를 마치고 개과천선(改過遷善)하며 사회생활에 적응했다. 심기일전하여 회사원, 건설현장 노동판 등을 전전하며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던 중 50대 초반에 큰 불행이 닥쳤다.<계속>

김주호<한국스카우트 충남연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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