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8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화폭에는 세계 평화를, 마음에는 하나 되는 조국 통일을 화폭에는 세계 평화를, 마음에는 하나 되는 조국 통일을 1967년 이응노의 삶과 예술여정에서 청천벽력 같았던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인해 억울한 수감 생활을 하며 그의 화업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응노의 회고에 따르면 “2년여의 옥중생활 시기는 자신의 화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며, 마치 30여 년을 갇혀 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옥중생활을 통해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인류애, 평화, 사랑, 조국 통일에의 염원이 더욱 강해졌다고 술회했다.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후 1970년대부터는 동양의 한자와 세계 문명의 문자 시원을 연구했고, 동양의 상형문자와 금석문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11-09 08:31 억압된 몸, 새로이 빛나는 예술혼 억압된 몸, 새로이 빛나는 예술혼 1960년대 초반, 유럽전역에 자유의 물결이 들불처럼 번져 나아갈 때, 유럽발 민주화 열풍은 가까운 일본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고, 국내의 많은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열망하며 반군사정권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1967년 대통령 재선에는 성공했으나, 장기집권을 위해선 국회의원 선거(1967년 6월 8일)에서 개헌이 가능한 2/3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로 제기됐다. 이와 관련 1967년 6월 8일 선거에서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2/3 의석을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야당과 대학생들이 6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10-12 08:31 프랑스에서 사는 한국인 화가 이응노 프랑스에서 사는 한국인 화가 이응노 1959년 독일 지역 순회전을 통해 미지의 한국인 화가로서 자신의 예술가적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였고 이응노는 1960년 1월 즈음 프랑스에 안착한다. 이응노의 술회에 따르면 ‘처음 독일과 유럽 및 미국 순회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으나 유럽에서의 전시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됐고, 동양화와 서양화가 융합한 새로운 현대회화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그를 붙잡았다’고 한다. 1959년 독일 활동시기, 4월 푸랑크푸르트에서의 와 7월 를 접하면서 선진국 유럽과 현대미술이란 드넓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9-14 08:31 서독으로 간 에트랑제(Etranger), 이응노 서독으로 간 에트랑제(Etranger), 이응노 민족미술은 분명 식민시대를 겪은 우리 민족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Nationalism) 운동에서 발원했다. 강제 병탄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식민지 시대 때 자행됐던 일본 화풍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민족미술에 대한 논의가 해방공간 화단에 주요 쟁점이 됐다. 김용준(金瑢俊, 1904~1967), 길진섭(吉鎭燮, 1907~1975), 김주경(金周經, 1902~1981), 오지호(吳之湖, 1905~1982), 윤희순(尹喜淳, 1902~1947) 등 식민지 시대에 등장한 미술이론가들은 민족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8-10 08:36 전통과 민족성을 중시한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의 추구 전통과 민족성을 중시한 한국적 모더니즘 회화의 추구 일본 유학시절 이응노는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선생의 지도하에 묵죽화와 같은 전통 문인화에서 벗어나 그림의 소재를 현실에서 찾고, 필법도 세밀을 주로 사용하며 대상을 클로즈업해 사실적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화풍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었다.조선과 일본을 10여 년간 왕래하며 금강산을 비롯해 서울 한강 주변과 경복궁, 충남 공주, 부여, 홍성 등지를 여행하며 부지런히 사생을 하며 사실적 표현능력을 키웠다. 아울러 전통적인 관념산수화에서 탈피해 사실적 표현과 서양화풍의 원근법이 가미된 풍경, 작품의 주제의식이 강조된 사생과 사의가 일치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7-13 09:36 전통묵죽화가에서 현대예술가로의 변모 전통묵죽화가에서 현대예술가로의 변모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한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의 청년들이 예술가를 꿈꾸며 일본의 유명 도쿄미술대학에 유학을 시작했으며, 1930년대에는 데이코쿠(帝國)미술학교, 타이헤이요우(太平洋)미술학교, 분카(文化)학원, 니혼(日本)대학 등 상당수의 학생들이 진학했고, 식민지 조선에 귀국한 후로 조선 화단에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표현주의 미래주의 등 다양한 미술 경향을 전파했으며 이와 더불어 많은 미술인 단체를 조직해 활동했다. 아울러 1921년 ‘서화협회전(1921~1935)’,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1922~1944)’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6-08 08:32 기나긴 무명 화가 시절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기나긴 무명 화가 시절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대나무 작품 으로 첫 입선을 한 이응노는 더욱 맹렬하게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스승 해강 김규진의 고된 집안일과 문하생으로서 그림 수련을 동시에 해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고암의 부지런함과 꿈을 향한 의지로 1여 년 정도를 버텨냈다. 그러나 고된 집안일로 인해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했고 창작활동에만 오롯이 전념하기 위해 스승의 문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선전에서 초입선한 경력뿐인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없었다. 떠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필요한 그림을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5-11 08:30 화가의 꿈을 향한 출가, 고된 문하생 시절 화가의 꿈을 향한 출가, 고된 문하생 시절 1920년 즈음 소년 이응노의 그림 솜씨는 동리(洞里)에서 제법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아버님 강권에 못이겨 학교를 자퇴한 후 농사일과 집안일을 돕는 틈틈이 병풍을 그리고, 갓집, 빗접고비 빗접(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두는 기구)에 꽃이나 새를 그려 넣어주며 어려운 살림을 도왔다. 그리고 그때 당시, 도제식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던 이응노는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염재 송태회(宋泰會) 선생께 사사했으나, 이 배움도 잠시, 여러 사정으로 곧 그만두어야 했다. 그림 그리기를 반대하던 유학자 집안의 명분과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4-13 08:30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이응노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이응노 고암 이응노 화백이 태어날 무렵의 대한제국시기는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1904.2.), ‘한일의정서(1904.2.)’를 강제 체결케했으며, ‘제1차 한일협약’(1904.8.), ‘제2차 을사늑약(1905)’에 의해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자 자주적 개혁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뜻있는 민중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을 통해 쇠퇴한 나라를 구하려 목숨을 내걸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 이응노 화백은 1904년 음력 1월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의 유학자 집안에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3-09 17:58 늘 새로움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한 예술가 늘 새로움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한 예술가 충남 홍성군을 대표하는 훌륭한 역사 인물 중 문화예술인으로서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있다. 화백은 한국과 유럽에서 활동했던 당시에도 한국 미술사와 더불어 유럽 미술사에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가로 예우를 받았고, 사후인 현재에도 한국근현대화단을 대표하는 훌륭한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에서, 여항문인 집안의 부친 이근상과 모친 김해 김씨의 슬하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고, 애국지사 이근주 선생(1860~1910)의 조카가 된다.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불의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2-18 08:34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