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詩] 작은 새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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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詩] 작은 새를 위하여
  • 서현진 <시인>
  • 승인 2023.10.12 0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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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잡아당겨
흰 빨래를 탈탈 털어 가지런히 말리자
이것을 참회라 부르기로 하자

돌돌 청소기를 돌려
집안 구석구석에 있는
먼지를 모아 
새의 부등깃을 만들자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하자

흰 쌀을 씻어 놓고
그 위에 호랑이 콩을 집어넣어 밥을 하자
그 콩을 화성에서 자라는 나무의 열매라고 속이자
이것을 헌신이라 부르기로 하자

감자, 당근, 양파, 쇠고기를 잘게 썰어
물을 넣고 끓이다가 
순한 맛 카레 가루를 넣고 휘저어보자
참 내 젖 한 방울도 양념으로 넣어보자
이것을 희생이라 부르기로 하자

싹싹 먹은 그릇들과 숟가락들을
개수대로 들고 가 
거품을 튀겨가며 요란스럽게 부시자
이것을 리듬이라 부르기로 하자

크기와 모양 색깔이
제각각 다른 이불과 베개들을
방마다 깔아놓고 
좋아하는 동물 인형들을 하나씩 던지자
이것을 평화라고 부르기로 하자

작은 새들이
뒤척이다 짐승들과 함께 잠이 들면
되도록 예쁜 꿈의 씨앗들을 어두운 하늘에 뿌려 보자
이것을 희망이라 부르기로 하자

시계 속의 
큰 톱니바퀴와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쉴 새 없이 돌아갈 때마다
그 안에 살던 쥐새끼들이 쪼르르 나타나
내 콧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작은 새들이
내 두 어깨를 조금씩 쪼아
점점 둥그스름한 언덕을 만들고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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