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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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홍주일보
  • 승인 2013.06.2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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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역사·문화·풍속 이야기③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용봉산. 병풍바위가 웅장함을 자랑한다.

 

 


'충청의 소금강' 용봉산, 충남도청 품에 안다
 

기암괴석·소나무 어우러져
신비로운 풍광 탄성 절로
마애석불 잔잔한 미소 온화 


충청도를 가르는 차령산맥의 지맥으로 가야산의 한 줄기인 용봉산(龍鳳山·381m)은 산세가 용의 모습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고려시대에는 차령 너머 충청도 서북쪽 최대 도시인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의 북쪽 진산이어서 '북산(北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8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팔봉산'이라고도 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산의 정상이 홍성군 홍북면에 속할 뿐 아니라 용봉사(龍鳳寺)가 있어 홍성군 지역을 용봉산, 예산군 덕산면 쪽에 수암사(秀岩寺)라는 절이 있다고 예산군 지역의 산을 수암산(260m)이라고 각각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기암괴석으로 뒤덮인 용봉산을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해서 오래 전부터 '소금강산'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용봉산 남쪽 기슭에 통일신라 39대 소성왕 원년(799)에 지은 사찰 용봉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오래 전부터 용봉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 용봉산 초입에 위치한 용봉사.


용봉산은 홍성군 홍북면과 예산군 덕산면 경계에 위치하며 높이는 낮지만 주변 전경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도처에 있다. 정상 북쪽 악귀봉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홍성과 예산의 군계를 경계로 남쪽에는 홍성군에서 관리하는 자연휴양림이 조성돼 있다. 산 전체가 기암괴석들로 이뤄진 투석봉, 병풍바위, 노적봉 등이 수석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금북정맥이 서해로 기어들기 전에 살짝 몸을 일으켜 세운 곳이 바로 용봉산이다. 겉보기에는 아담하지만 산봉우리마다 기암괴석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산세는 '작은 금강산'을 보는 듯 신비로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 풍광이 얼마나 뛰어나면 '용의 몸통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 형국'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홍북면 상하리 용봉초등학교 옆길을 들머리로 삼아 오르는 산행은 해발고도 381m의 최고봉을 찍고 능선을 따라 용바위을 거쳐 마애석불과 용봉사를 둘러보고 구룡대로 내려선다. 여기서 마을 안길을 따라 원점 회귀할 수 있지만 용봉산자연휴양림으로 방향을 잡으면 산허리를 따라가다 용봉폭포를 거쳐 되돌아 올 수 있다. 용봉산이 품고 있는 빼어난 경치는 해발 1000m의 험준고산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다만 정상에 올라서면 서해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단지 기대로 그칠 뿐이다.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에 막혀 서해바다가 가리니 용봉산이 보기보다는 낮기는 낮은가보다.

 

 

 

 

 

 

▲ 현 용봉사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용봉사 옛 터.


최영장군 활터에는 최영장군이 소년시절 애마와 내기를 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최영장군이 쏜 화살과 애마 중 누가 더 빠른지 시합을 해 말이 빨리 가면 큰 상을 매리고 질 경우 목을 치겠다고 했다. 애마는 자신 있게 끄떡였고, 최영 장군은 홍성읍의 은행정 방향으로 화살을 쏘고 말을 내달렸다. 그러나 최영장군이 목적지에 도착을 하니 그곳에는 화살이 없었고, 최영장군은 내기에 진 사랑하는 애마의 목을 치고 나니 곧 화살이 피융하며 지나갔다고 한다. 이에 최영장군은 자신의 경거망동을 후회하며 애마를 그 자리에 묻어 주었는데 이곳이 홍성읍 은행정의 금마총이다.

용봉산의 노적봉 아래에는 행운바위가 있는데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이곳에 돌 하나를 올리고 악귀봉으로 향한다. 발아래 저수지는 6월의 초록빛 하늘을 머금고 눈부시게 푸르다. 악귀봉은 산봉 전체가 기암괴석의 집합체인 듯싶다.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우회해서 갈 만큼 험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야~'소리가 나오도록 멋지다. 신록의 산바람을 가슴으로 맞으며 용바위를 거쳐 신경리 마애석불<사진>로 내려선다. 마애석불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 용봉산에 있는 불상으로 돌출된 바위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높이 4m의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크고 풍만하며, 잔잔한 미소가 흘러 온화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목 밑에서는 굵직한 몇 가닥의 선으로 표현되었지만 아래쪽은 가느다란 선으로 도식화되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파낸 바위면을 이용해 희미한 음각선으로 윤곽만을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얼굴 윗부분은 입체감이 있고 원만한데 비해 아래로 내려갈수록 양감이 약해져 균형이 깨지고 있는 작품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 손을 다리에 붙이고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려는 듯 왼손을 든 모습이 온화하고 인자하다. 용봉사로 내려서는 길에는 자연스럽게 병풍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엿가락을 붙여놓은 듯한 바위가 군락을 이루며 저마다 우윳빛 때깔을 뽐내고 있다. 병풍바위는 밑에서 올려다보면 넓은 화폭처럼 펼쳐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치 설악산의 울산바위를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용봉사와 병풍바위, 충남도청신도시 
용봉산의 좌우 중턱에는 고려시대의 고찰 용봉사와 마애석불, 미륵석불이 있으며, 병풍바위 아래에는 용봉사가 단아하게 앉아 있다. 백제 말에 지어진 절집은 온데간데없다. 옛 문헌에는 영봉사라고 기록되어 있는 용봉사는 1905년 새로 지었다. 대웅전과 지장전, 적묵당, 산신각, 일주문이 전부인 소박한 절이다. 대웅전에는 조선 숙종 때 제작된 '영산회괘불탱화'(보물 1262호)가 보관돼 있다. 용봉사의 본래 위치는 현재의 곳이 아니라고 한다. 현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더 올라간 지점에 있었지만 평양 조 씨의 가문에서 조상묘를 만들면서 폐사(閉寺)하는 바람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는 것. 지금은 절을 받치고 있는 축대의 돌 크기만이 당대의 규모를 짐작케 해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용봉산은 천년 홍주골 역사의 언저리에서 충남도청신도시를 품에 안고 있다. 높지 않으면서도 빼어난 경관을 지닌 용봉산,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터전인 신도시로 몰릴 것이고, 용봉산을 넘는 장엄한 붉은 일몰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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