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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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유태헌·한관우
  • 승인 2013.09.1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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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역사·문화·풍속 이야기⑭

고구려·신라·백제의 국경지대 천안 성거산·태조산 

삼남지방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
태조산, 고려태조가 군사 주둔시켜
흑성산, 독립기념관 가슴으로 품어 


광덕산에 이어 천안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성거산(聖居山, 579m)은 태조산(太祖山, 422m), 흑성산(黑城山, 504m)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의 주능선을 이룬다. 성거읍과 입장면, 북면에 걸쳐 있는 성거산은 위례산과 태조산, 흑성산을 이어주고 있어 어느 쪽에서든 진입이 가능하다. 흑성산은 기슭에 독립기념관을 가슴으로 품고 있다. 일찍부터 천안(天安)은 삼남지방으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였고 충남의 관문이다. 과거 고구려, 신라, 백제가 다투던 국경지대였으며, 후삼국 시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중요시했던 지역이었다. 후백제와 겨루던 고려 태조는 최전방 국경도시인 운주(지금의 홍성)와 합덕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신라와의 국경지대인 천안 태조산에 군대를 주둔하면서 이 지역을 크게 확장했다. 태조는 나말여초에 크게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신봉했고, 태조 13년(930) 후백제 신검과 맞서고 있을 때 태조산에 올라 산신제를 지냈고, 사찰을 짓기도 했다. 이곳은 왕이 머물렀다고 해서 유왕골(留王谷), 유려왕사(留麗王寺) 등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또, 사후에 자신의 묘지도 천안의 진산인 지금의 유량동 뒷산으로 정하고, 차령산맥의 지맥을 이루고 있는 이곳의 산세가 왕자(王字)와 같다고 해 왕자산으로 불렀던 산이 지금의 태조산이다.

성거산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직산면을 지날 때 동쪽의 산을 보고 신령스럽다 해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성거산'이라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태조는 천안부(府)를 설치하고 도독을 배치했다. 이렇듯 천안의 성거산과 태조산 줄기는 천안의 동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로, 지금도 태조산은 천안의 진산으로 천안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천안시가 만든 홍보책자에는 태조산을 '수려한 산세에 감탄이 절로 나는 산'이라 했고 '둥그스름하게 연꽃이 핀 듯한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천안의 명산'이라 표현했다. 산 이름 자체가 태조(太祖), 성거(聖居; 성인이 머무는 곳)로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고려 태조가 소중히 여기고 아끼던 태조산은 천안시내에서 경부고속도로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인데, 북쪽에는 상명대학교를 비롯해 호서대, 백석대, 천안외국어대학 등과 각원사(覺願寺) 등이 있다. 이 일대는 대학이 들어서면서 많은 카페와 음식점들이 자리하면서 천안시민들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 천안시청 문화관광 담당자의 설명이다.

이곳은 천안시가 1987년부터 35만 8785㎡에 공원을 조성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것. 태조산공원은 차량이 왕래할 수 있도록 높은 산줄기를 절단해 만든 왕복 2차선 도로가 있다. 절단된 도로 위로는 태조산을 오르는 등산객을 위한 구름다리도 만들었다. 이곳은 휴식공간으로서의 공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눈에 띄는 조형물들이 있는데, 전쟁관련 무기와 조각상들이 그것이다. 공원 안쪽에는 '천안인의 상' 조형물과 주변에는 국군이 사용했던 전투기와 전차 등의 실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천안시가 지난 1990년부터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해오던 천안함이 2011년 서해에서 북한군과의 교전으로 희생되자 '천안함 46용사'의 애국과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했고, 천안함의 모형도 전시하고 있어 평화와 전쟁이라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태조산 대머리봉 바로 아래 산자락에는 불국사 다음으로 가장 큰 절이라는 각원사가 있다. 이 사찰은 지난 1977년 5월 재일교포 김영조 씨가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창건한 절이라고 이 사찰의 스님은 설명한다. 각원사는 전통사찰과 달리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같은 가람배치구조를 따르지 않고, 203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범종각이 있고, 그 위에 대웅전이 있다. 1996년 준공된 대웅전은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하지만, 각원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웅전 왼편으로 돌계단을 올라가 중턱 너른 광장에 세운 높이 12m, 둘레 30m, 총 중량이 60톤에 이른다는 청동 아미타불좌상이다. 각원사는 천안 12경중 제6경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태조산 서북쪽 중턱에는 고려시대의 절인 성불사도 있다. 최근 성불사의 원경 주지스님은 마곡사 주지에 당선됐다고 한다.

성거산에는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북쪽의 위례산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 초기 도읍지였던 위례산성(충남기념물 148호)전설을 만날 수 있다. 아래 산 중턱에는 만일사가 있으며, 경내에는 5층 석탑과 마애불 등 문화재가 있다. 또 산자락에는 고려시대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천흥사 터가 있으며, 이곳에는 2단의 기단 위에 5층 석탑(보물 제354호)과 당간지주 등이 보물급 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당시 절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저수지 공사로 많은 부분이 유실됐다고 한다. 성거산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거산성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공군부대가 군사기지로 이용하고 있어 옛 모습이나 산성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정상 표석 또한 군부대 통신시설로 인해 낮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다.

성거산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충남기념물 제175호인 성거산 천주교 순교자 성지다. 성거산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감영에서 참수 당해 순교한 최천여(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형제, 배문호(베드로)와 고의진(요셉), 채서방 며느리(최종여의 며느리인데 당시 발음상 잘못으로 채서방으로 잘못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함) 등 5명의 순교자를 비롯해 무명순교자와 신앙 선조들의 유해 74기가 제1순교묘역과 제2순교묘역에 나뉘어 묻혀있는 성지이다. 여기에 유골이 묻히게 된 것은 1959년 성거산 정상에 미군 레이더기지를 건설할 때 제1묘역 바로 위의 차도에 묻혀있던 시신들을 순교자 최베드로의 증손인 최용기 씨 등의 노력으로 이곳으로 이장하게 됐다고 전한다. 이장 당시에 목 없는 시신들이 여럿 나왔고 십자가 등 성물이 많이 출토됐다고 당시의 상황을 천주교대전교구 성거산 성지 김종훈 신도회장은 설명한다.

이곳 성지의 모체는 이곳에서 남쪽으로 700여m지점에 있던 소학동(쇠악골)교우촌이라고 한다. 한국 천주교회가 천진암에서 발생 내포지방(삽교천유역)에 퍼져나가다가 박해가 시작되다 산간지역인 천안시, 풍세, 광덕, 성거, 북면 등지로 피신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높고 깊은 소학동이 중심 교우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뮈델 주교를 비롯하여 니콜라 칼레 신부(강신부), 페롱 신부, 두세 신부, 베르모델 신부가 숨어 지내며 암암리에 사목활동을 했던 뜻 깊은 유적지라는 설명이다. 현재는 그 당시의 집터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배나무들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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