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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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유태헌·한관우
  • 승인 2013.07.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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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역사·문화·풍속 이야기 ⑥

 

▲ 덕숭산 수덕사 전경.

 

 

 

 

'선<禪>의 종가' 천년고찰 수덕사 품고 있는 덕숭산

불교계선 다비사찰로 유명
고승·예술가들 흔적 곳곳에 

'선<禪>의 종가' 천년고찰 수덕사 품고 있는 덕숭산 불교계선 다비사찰로 유명 고승·예술가들 흔적 곳곳에 예산군 덕산면에 소재한 덕숭산(해발 495m)은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를 품에 안고 있다. 송림이 울창한 이곳엔 불교계 4대 총림중 하나인 덕숭총림이 있다. 아쉽게도 수덕사 창건과 관련된 역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했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백제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중수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 말에 경허(鏡虛)가 선풍(禪風)을 일으킨 뒤 1898년(고종 35) 그의 제자인 만공(滿空)선사의 중창으로 번성하여 현재 36개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선의 종가, 천년 고찰인 수덕사의 가장 큰 보물은 국보 49호로 지정된 대웅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무량수전 등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 손꼽힌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세워진 목조건축물로 고려시대에 건축되었지만 백제시대의 건축에서 흔히 사용했던 '곡선'을 살려준 작품으로 꼽힌다. 건축연도가 확실하고 뛰어난 조형미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니 구석구석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덕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 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혀주기 위해 기둥머리와 처마 사이에 댄 나무쪽들)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자세히 보면 공포 구조와 옆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곡선이 아름답다. 특히 소꼬리 모양의 우미(牛尾)량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대웅전 편액은 이광(李珖)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수덕사 입구에 세워진 시비.
한편 수덕사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향운각·금선대·전월사·망월대·금강암 등 수많은 불교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수덕사 뒤쪽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정혜사와 견성암 등 암자가 보이는데, 옛날 경허 선사와 만공 선사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에는 경허의 제자인 혜월·만공 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수많은 비구·비구니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덕숭산 정상 부근에 있는 능인선원은 100여년 전 만공 스님이 '금선대'라는 초가를 지은 것이 시초가 됐다. 근대 선의 등불을 밝힌 '한국불교의 태산'으로 불리는 경허·만공 선사와 선농일여(仙農一如)를 실천한 벽초의 선맥을 잇는 '선지종찰'의 대표적인 선원이다. 스님들 사이에 삼현칠성(3명의 큰스님과 7명의 성인)이 나올 산으로 통하는 덕숭산의 북쪽 능선은 가야산(678m)으로 이어진다. 덕숭산과 가야산은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경치를 담고 있어 1973년 3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덕숭산은 '3덕(德)'이 모인 곳이라고 한다. 덕숭(德崇), 수덕(修德)과 함께 '덕산(德山)'이 그것이다. 모두 '덕을 숭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덕숭산과 수덕사가 모두 덕산면에 있으니 덕산이 모두를 품은 셈이다. 덕산의 대명사는 단연 윤봉길 의사의 생가와 사당인 충의사, 그리고 한해 500만 명이 찾는 덕산온천이다. 율곡 이이는 문집 '충보'에서 "날개와 다리를 다친 학이 날아와 상처에 온천물을 발라 치료하고 날아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덕산온천의 역사적 단면의 한 대목인데, 1917년 처음으로 탕을 이용한 온천으로 개장했다. 지하 300m 깊이에서 43~52도의 약알칼리성 중탄산나트륨 온천수가 나온다. 이 일대 72만 2700㎡를 덕산온천지구로 지정,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덕산을 함께 감싸고 있는 가야산과 마찬가지로 덕숭산도 이곳저곳이 절개되거나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덕숭산 비탈에도 전원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파헤쳐졌다. 무분별한 대규모 개발사업 등으로 훼손과 파괴가 가속화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가 곱씹어 볼 일이다.

 

 

 

 

 

 

▲ 수덕사 선미술관.


옛날 홍주고을에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덕숭이란 낭자를 보고 반해 청혼했지만 여러 번 거절당한다. 덕숭은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달라는 조건으로 청혼을 승낙한다. 수덕은 절을 지었으나 낭자에 대한 연모 때문에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 전소됐다. 목욕재계하고 다시 절을 지었지만 역시 불에 탔다. 세 번째는 부처만 생각하고 절을 지어 결혼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덕숭은 사라졌고, 그의 버선만 손에 들려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는 바위로 변했고, 그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꽃을 '버선꽃'이라 부르게 된 연유다. 덕숭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절은 수덕의 이름을 따 수덕사가 됐고, 산은 덕숭의 이름을 따 덕숭산이 됐다고 한다. 결국 수덕사는 덕숭산의 꽃이다. 덕숭산은 몰라도 수덕사는 대다수가 안다. 덕숭산이 '수덕산'이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일 터이다.

또한 수덕사는 다비(茶毘) 사찰로 유명하다. 스님들이 모두 수덕사에서 다비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다비가 1~2일 걸리는데 수덕사에서는 3~4시간이면 끝난다고 한다. 이는 소나무와 절 기운이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 몸에서 나온 것인데 수행에 방해가 된다'며 다비식 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점도 특이하다. 불교계에서는 금강산에서 출가하고, 묘향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리산에서 깨달음을 전하고, 덕숭산에서 열반하는 것이 행복으로 통한다는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까닭이다.

수덕사에는 큰 스님과 여러 유명 예술가들의 흔적도 많다. 경허 스님과 그의 제자 만공 스님이 유명하다. 두 스님은 조선 말기부터 구한말 불교가 세속화하는 것을 막고 참선을 일궈냈다. 경허는 인근 서산 부석사 등 사찰을 거쳐 해인사로 갔지만 만공 스님은 수덕사에서 입적했다. 숭산·원담·법장·수경 스님도 이곳 출신이다. 따라서 '수덕사는 한국 선의 종가'로 통한다. 만공 스님이 최초의 비구니 암자인 견성암을 지었지만 수덕사가 비구니 절은 아니다. 일화 하나는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수덕사의 여승'은 한때 금지곡이 됐었고, 비구니들이 '퇴폐적'이라 불만을 터뜨려 노래를 부른 가수 송춘희가 한동안 수덕사에 오지 못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수덕사에는 또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개화기 최초의 여류문인이며, 신여성운동의 선구자였던 일엽 스님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일엽이란 필명은 춘원 이광수가 지어 줬다고 한다. 지금도 환희대 등에는 이들의 흔적이 배어 있다. 일엽 스님과 나혜석은 수덕사로 오르다 보면 왼쪽에 있는 수덕여관에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수덕여관은 조선조부터 구한말까지 손님이 거처하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혜석은 만공 스님으로부터 "너는 스님이 될 재목이 아니다."라고 거부당하자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여관은 나혜석의 영향을 받은 고암 이응노(1904~1989)화백이 1944년 매입,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살았다고 전한다. 고암은 1967년 동백림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이곳에 잠시 묵었다고 하는데, 이때 직접 새긴 추상문자 암각화 2점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법을 탈피해 독자적인 예술의 경지를 터득하면서 프랑스 화단에 한국미술의 수준을 자랑한 고암은 1944년 수덕여관을 구입해 살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현재 수덕여관은 2005년 말 고암의 큰조카로부터 수덕사에서 매입, 원형을 복원해 각종 문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선미술관은 전시회를 비롯해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도 전시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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