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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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유태헌·한관우
  • 승인 2013.08.16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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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역사·문화·풍속 이야기 ⑩

 

▲ 세계 최초로 건설이 추진된 굴포운하는 지금은 사라진 채 논으로 변해있다.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된 '굴포운하' 아시나요? 

800년전 세계 최초로 추진
수에즈·파나마 보다 500년 앞서
심한 간조차로 수로 무너져 중단
신털이봉설화 판목운하 애환 전해 

 

우리나라서 가장 오래된 '굴포운하' 아시나요? 800년전 세계 최초로 추진 수에즈·파나마 보다 500년 앞서 심한 간조차로 수로 무너져 중단 신털이봉설화 판목운하 애환 전해 서산 팔봉산에서 서해로 흐르는 금북정맥 길목에는 세계 최초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운하가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까. 태안읍 인평3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노인들에 의하면 일제시대의 간척공사와 지난 1982년에 물막이 공사가 완료된 대규모 간척사업으로 현재는 천수만(淺水灣)의 바닷물이 멀리로 물러나 있지만, 옛날에는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인평저수지도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전한다.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의 가로림만 바닷물도 지금은 조금 물러나 있지만 지금의 어송저수지 일대가 전부 바다였다는 것이다. 가로림만 바닷물과 천수만 바닷물은 오랜 세월 갯내음과 해조음을 서로 보내고 나누며 지내왔고, 바닷새들은 두 바다 사이를 쉽게 왕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른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굴포(掘浦, 우리말로 '판개' 즉 '땅을 파서 만든 개'라는 뜻)운하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두 동네의 경계 지점에 남아 있는 1km 정도의 흔적은 저수지식(갑문식) 운하의 흔적이라고 마을 주민들은 설명한다.

굴포운하를 개착하게 된 요인은 삼남지방의 세곡미를 서울로 조운함에 있어 조운선단이 태안반도의 안흥량 관장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안흥량은 서해안상에 돌출한 장봉으로 바다에 암초가 많고, 또한 급격한 조류로 인해 빈번히 조운선이 전복(顚覆)되고 파선으로 인하여 국가적인 재정손실이 컸다. 그래서 세곡미의 안전수송과 조운에 따른 지리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키려고 지금의 굴포운하 개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국가의 재원이 세곡미라는 당시의 사회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선 현종 때에는 굴포개착지 주변에 많은 조창(漕倉)들을 설치해 조운의 편의를 도모했으나 조운행정에서 야기된 문제들로 인해 폐창하고 말았다.
 

▲ 굴포운하지를 알려주는 표지판과 안내도.

 

 


비록 설창육운안(設倉陸運案)의 실행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세창고지와의 관련으로 인해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해로를 따라 많은 창촌락이 발달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굴포운하'지는 수에즈운하(1669)와 파나마운하(1914)보다 500년이나 앞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우리나라 거대 토목공사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적지로 꼽히고 있다. 이렇듯 세계 최초이며, 우리나라 운하의 효시로 꼽히는 공사는 첫 번째가 태안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판개'이고, 두 번째는 소원면 의항리의 '개미목'이며, 세 번째가 안면도 '판목' 공사다.

태안의 '판개'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운하공사다. 북쪽의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에 인접한 가로림만과 남쪽의 태안읍 인평리의 약 3km에 달하는 지협(地峽)인 천수만을 연결하고자 했는데, 총길이는 7㎞정도다. 고려 숙종(1096~1105년)과 예종(1106~1122년)을 거쳐 굴포운하의 개착공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 인종 12년(113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 조선중기까지 약 400여 년간을 통해 우리나라 운하사상 가장 오래됐다. 수천 명의 인력을 투입했으나 3㎞ 정도를 남겨두고 개착지의 지질이 화강암층이라 당시의 기술로는 암석을 뚫지 못했고, 높은 간조의 차를 극복하지 못한 자연적인 요인, 즉 갯벌이 자꾸 무너져 수로를 메우는 바람에 중단됐다고 한다. 중단된 지 250여 년이 지나 왕강(王康)의 건의로 공양왕 3년(1391년)에 공사는 재개됐다. 그러나 암반층의 출현으로 또 중단해야만 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종 12년(1412년)에는 종전의 해수관통 방식을 바꾸어 독특한 '저수형' 갑문식 운하가 탄생한다. 암반층 구간에 5개의 저수지를 계단식으로 만들어 각 저수지마다 배를 두고 세곡을 릴레이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일곱 차례나 옮겨 날라야 했으므로 매우 번거롭고, 미곡 손실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뾰쪽한 수를 찾고자 태종이 직접 태안을 두 차례 방문했으나 실효성이 없어 '저수형' 판개운하는 중단됐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안흥량의 대형사고가 잇달았다. 고심 끝에 중종은 운하의 위치를 변경했다. 그곳은 '의항(蟻項) 굴포'인데 우리말로는 '개미목 판개'다. 오늘날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와 송현리 사이에서 확인된다.

 

 

 

 

 

이곳에는 1522년에 3000여 명의 인력을, 1537년에 중(僧) 5000여 명을 투입해 한 때 준공됐다고 만세를 불렀으나 막상 통수(通水)를 해보니 시원치 않아 사실상 실패했다고 한다. 이렇게 개미목마저 실패하자 옛 판개 운하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또 다른 방식이 도입됐다. 이른바 김육(1580~1658년)의 창설육수책(設倉陸輸策)이었다. 남쪽 천수만과 북쪽 가로림만 연안에 창고를 설치하고, 창고 사이 육지는 우마차로 운반하는 방식이다.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도 거듭 제안해 시행됐지만, 이 또한 싣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곧 폐지됐다고 한다. 이로써 안흥량의 난행을 벗어나려는 500여 년의 판개 노력은 모두 마침표를 찍게 됐다.

한편 '꿩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소나무가 편안히 잠자고 있던 안면곶(安眠串)으로 관심이 쏠렸다. 보령 출신의 유명한 풍수가 토정 이지함(1517~1578년)이 아름다운 안면도에 놀러왔다가 "나중에 반드시 안면곶 뒷 줄기를 파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마디 예언을 했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태안의 향리 방경령이 충청감사 김육에게 판목운하 건설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1638년 무렵, 운하공사가 시행됐다. 그 결과 '안면곶', '안면소(所)', '안면도(道)'라고 불리던 이곳은 '안면도(島)'라는 섬이 됐다.

특이하게도 이전의 공사와는 다르게 공사상의 난맥을 지적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만들어졌다는 신털이봉 설화만이 전해오고 있다. 팔봉면 진장리에는 '신털이봉'이라 불리는 작은 야산이 있다. 1000평정도 되어 보이는 소나무로 덮여 있는 작은 야산이지만 이 산은 신털이봉이라는 확실한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세월 거듭된 굴포운하 공사 때문에 생긴 산이다. 공사가 시행될 때 인부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서 생긴 산이라는 것이다. 휴식을 하거나 밥을 먹으러 갈 때 지정된 곳에 가서 짚신을 털었고, 그 흙무더기들이 산을 이루게 됐다고 마을 주민들은 전한다.

이런 판목운하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태안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경계에 약 200m정도 존재한다고 한다. 이는 세곡의 안전한 운송을 위한 운하이다. 천수만에서 출항한 배가 판목운하를 통과 안흥포구로 직행하면 60㎞가 단축되는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안면도 주민들은 안면대교가 건설되는 1970년까지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태안지역의 운하공사는 오늘날의 잣대로 보면 '몇 달이면 가능한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실패를 거듭했던 것이다. 하지만 난행을 극복하기 위한 끈질 긴 집념과 의지, 그리고 자연에 대한 도전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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