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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기획취재
손규성의 홍주골 톺아보기
한관우의 홍성비전 희망수첩
2010년 기획취재
홍주골 2050 희망 리더
홍주골 골목 기행
우리동네 행복마을
6.25전쟁 60주년 특집연재
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산꾼 유태헌의 전국 100대 명산 산행기
지역농업 특화사업으로 농업 경쟁력 키운다
2011년 기획취재
홍성의 도시브랜드, '문화·예술이 답이다'
경관농업, 홍성군의 새로운 농촌 소득창출 대안이다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2012년 기획취재
FTA파고 넘는 농축산 블루오션, 친환경이 답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사회적기업이 해법이다
삼성-허베이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고 5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다
척박한 지방문화현장에서 이응노 기념관의 활로 찾기
폐교, 지역 구심점으로 거듭나다
농어촌체험관광, 프로만이 살아남는다
바람직한 홍성·예산 통합 방안을 찾다
빗물활용, 녹색성장도시로 가는 출발선이다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 한옥마을 도시브랜드화 전략
지역사회복지, 사회적경제로 실현하자
농촌경제, 희망을 찾아서
2013년 기획취재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
지역경제 선순환 활성화가 해답이다
'홍주' 지명역사 1000년, 기념사업 추진하자
폐기물도 자원이다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친환경농축산 앞당기는 가축분뇨 공동자원화
문화예술로 바라본 공유경제
가축분뇨 자원화로 친환경축산 앞당긴다★
사회적경제로 해법찾는 도시재생
한관우 본지 발행인, 유럽의 지역신문을 가다
2014년 기획취재
도시재생사업, 지역의 경쟁력이다
친환경 녹색도시의 시작 자연형 하천복원
환경파괴가 부른 재앙 충청해안의 토사퇴적
만해 한용운의 발자취를 찾아서
홍성농업, 농민과 친환경이 답이다
홍성이 낳은 세계적 화가 고암 이응노
장희구 박사의 만해 한용운의 시 읽기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2015년 기획취재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위기의 독거노인, 그룹홈이 대안일까?
바다영토경계분쟁 해결의 실마리를 찾자
지역신문의 콘텐츠와 매체다각화
말산업과 지역경제
뭉쳐야산다, 사회적협동조합
홍성을 세계적인 오카리나 메카로 만들자
지명역사 1000년 ‘홍주’ 고유지명 되찾자
광천젓갈의 생존전략 공생이 답이다
홍성의 골목상권 경쟁력 테마로 승부한다
농촌의 소규모 학교가 살아야 지역도 살아난다
옛골목길, 스토리와 디자인을 입혀야 뜬다
사라지는 전통가업, 대를 잇는 사람에게 길을 묻다
홍성, 폐기물 재활용·생태환경 예술의 메카로 만들자
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
홍성을 작은 박물관도시로 만들자
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2016년 기획취재
물부족 가뭄극복, 빗물활용 물관리가 경쟁력이다
청년의 창의적인 생각이 창조농업이끈다
고령사회 홍성, 노인고용에 눈을 돌리자
역사문화도시 홍성, 지역문화재단 통해 현실화 되나
작은 동네책방의 희망과 전략, 공동체문화예술 소통공간을 꿈꾸다
용봉산평화인권공원(가칭)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자유학기제, 농촌학교와 마을을 잇는다
홍주지역 중고제와 한성준의 맥, 그 소리와 가락의 복원
홍성 문화예술마을조성,무엇을 담아야 하나
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고택의 재발견-선비정신과 공간의 미학, 문화관광자원화 방안의 지혜를 읽다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폐교에 홍성군립미술관 건립 가능할까?
자원봉사로 행복한 삶과 희망을 함께 나눠요
홍성의 친환경 축산의 미래, 유기축산에서 답을 찾다
2017년 기획취재
가축분뇨, 축산악취, 해결방법은 없을까?
위기의 작은학교 특성화로 되살리자
자유학기제 시행 1년, 아이들이 행복한 진로교육
건강한 마을공동체 만들기, 왜 어린이도서관인가?
가업을 잇는 청년, 청년CEO, ‘농촌에서 삶의 가치를 찾다’
일제시대 아시아 최대 석면광산 충남, 안전지대일까?
지명역사 1000년 자치단체,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
용도 폐기된 공공건축물의 재활용 방안
전통발효식품, 농업농촌 신혁신 모델 되다
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2018년 기획취재
농촌의 빈집에서 도시재생의 길을 찾다
폐교위기 농어촌 작은학교에서 희망을 찾다
충청권 지진 안전지대 아니다!
도시청년들, 귀농·귀촌의 꿈을 실현하다
당신의 자소서
다 함께 홍성사람-다문화가족 만세
로컬뉴스 활용을 통한 독자마케팅 활성화
역사자료로 살펴보는 수룡동 마을
삶과 기억의 편린
순간포착 미디어속으로
2019년 기획취재
천년 역사문화유산 홍주성의 부활
충남의 문화재 재발견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헌책방에서 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길을 묻다
마을의 역사문화·공동체의 삶을 읽다
충남의 자연유산 마을 숲, 미세먼지시대 공동체의 삶과 생명의 공간이다
이주노동자 '그들'이 아닌 '우리'다
미디어를 통한 마을 공동체 회복을 꿈꾸다
2020년 기획취재
'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100경
천년역사도시, 홍성도심재생 젊은 문화도시가 답이다
풀뿌리미디어 마을신문, 동네를 바꾼다
홍성군 청사이전, 균형발전 기회인가? 위기인가?
농어촌 빈집·폐건물, 공유경제 가치를 담다
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2021년 기획취재
도심속 자연하천, 생명과 문화가 흐른다
지역문학관 활성화 방안을 찾다
충남혁신도시, 테마·스토리 입혀야 사람이 몰린다
전통시장 활성화, 그곳엔 삶과 문화가 흐른다
도심 생태하천 복원, 주민들의 행복공간 복원이다
혁신도시, 현장에서 미래의 길을 묻다
2022년 기획취재
전통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다, 100년 가업을 잇는 사람들
폐건물·폐산업시설, 문화재생 가치를 담다
생태경관 농업유산, 다랑이논을 보존하자
사라지는 원도심 근대문화유산, 어떻게 보존·관리할까
농촌지역 폐교의 재발견, 문화예술이 꽃피다
국가숲길에서 내포문화숲길의 역사와 문화를 묻다
국가숲길, 내포문화숲길의 역사·문화유산
희망마을공동체 스토리
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2023년 기획취재
고치고, 바꾸고, 새롭게 캠페인
홍성 원도심 활성화, 특화거리에서 답을 찾다
충남의병기념관, 충남의 항일·의병정신 어떻게 담을까
국내 최대 석면피해지역 충남, ‘석면피해기록관’을 세우자
충남도청신도시 주변마을 문화유산
고향사랑기부제, 일본은 어떻게 성공했나?
100년 정미소·양조장에 문화예술이 꽃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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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농업의 미래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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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1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22 3·9 제20대 대통령선거
2020 4·15 제21대 국회의원선거
2019 3·13 제2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
2018 6·13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7 5·9 제19대 대통령선거
2016 4·13 제20대 국회의원선거
2015 3·11 제1회 전국동시조합장선거
2014 6·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 4·11 제19대 국회의원선거
2012 12·19 제18대 대통령선거
2010 6·2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08 4·9 제18대 국회의원선거
2007 12·19 제17대 대통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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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 북대한해(North Korea Sea) 대한해(大韓海 Daehanhae) 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단독(單獨) 표기(表記) 환원(還元)해야 http://blog.naver.com/msk7613 1945년 8월 15일 대한국(大韓國:1897- )을 1910년 불법 병탄(不法 倂呑:illegal annexation)한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로부터 주권과 한반도(韓半島:Korean Peninsula)와 제주도,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Dokdo),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 북대한해(North Korea Sea)의 대한해(大韓海:Daehanhae) 등 영토,영해를 되찾은 대한국(大韓國:1897- ) 광복(光復)을 하였다. 1946년 유엔(UN)연합국 최고사령부(聯合國最高司令部)는 제주도,울릉도,독도(獨島)를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에서 분리되는 땅으로 명시한 유엔(UN)연합국 최고사령부(聯合國最高司令部) 지령(SCAPIN) 677호를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1948년 8월 15일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9)의 정체만 1919년 4월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전환하고 국호 및 영토를 계승하였다. 1948년 이후 공산반군 괴뢰정부기 세계 공산국가의 지도국인 소련, 중국의 전폭적인 군사력 원조를 받고 1950년 6월 25일 소련(蘇聯) 스탈린이 공산반군 괴뢰정부를 앞세워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침략한 공산연합군과 유엔연합군의 3차 세계대전인 6.25 전쟁의 발발로 대한해(大韓海:Daehanhae) Sea Of Korea 단독(單獨) 표기(表記)를 환원(還元)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는 1952년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 이사부길 독도 안용복길인 독도(獨島)를 포함하는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선포하고 1954년 독도(獨島) 남동쪽 암벽에 ‘韓國領‘과 태극기(太極旗)를 새겨놓았고 바닷가나 섬 같은 곳에 탑 모양으로 높이 세워 밤에 다니는 배에 목표, 뱃길, 위험한 곳 따위를 알려 주려고 불을 켜 비추는 등대(燈臺)를 설치하였으며 1982년 문화재청은 독도(獨島:Dokdo)를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한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 336호로 지정하였고 1999년 독도천연보호구역(獨島天然保護區域)으로 관리하고 있다. 국제수로기구(IHO)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에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Daehanhae)를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의 대한국(大韓國) 불법(不法) 침략(侵略) 전 Sea Of Korea 단독(單獨) 표기(表記)를 환원(還元)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지도에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 북대한해(North Korea Sea)로 표기하여야 한다. 일본(日本)이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단독(單獨) 표기(表記)를 환원(還元)하지 않고 1929년 멋대로 바꾼 일본해 표기 고수를 주장하는 것은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통감부,총독부의 대한국(大韓國) 불법(不法) 침략(侵略) 역사, 대한국(大韓國)의 주권, 영토를 회복한 광복(光復)을 부정하는 것이며 선린(善隣:good-neighbor relationship)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특히 일본(日本)이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不法)인 국경선을 임의로 획정하는 것은 선린(善隣:good-neighbor relationship)이 아니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불법(不法) 침략(侵略) 도발(挑發)이다. 일본(日本)이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不法)으로 표기한 왜곡(歪曲) 교과서를 검정 승인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불법(不法) 주장하여 대한국(大韓國:1897- ) 영토 주권(領土 主權)을 침해(侵害)하는 외교청서, 방위백서 발간하고 있지만 신라(新羅)·고례(高禮:Korea)·백제(百濟)의 3한국(三韓國) 중 하나인 신라국, 고려국, 1895년 울릉도 도감을 설치한 조선국(朝鮮國)을 이어 통치해온 독도(獨島:Dokdo)는 1897년 10월 12일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Gojo Gwangmooje:1897-1919)가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한 이후 116년간 대한국령(大韓國領)이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Gojo Gwangmooje:1897-1919)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欝陵島)를 울도(欝島)라 개칭(改稱)하여 강원도(江原道)에 부속(附屬)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하고 울도군(鬱島郡)이 울릉전도(鬱陵全島:울릉도), 석도(石島:독도)를 관할한다고 명시하였다. 일본(日本)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不法) 표기한 외교청서, 방위백서 발간, 각급 학교 역사 왜곡(歪曲) 교과서의 발간,검정 승인,채택은 묵과(默過)할 수 없는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침략(侵略) 도발(挑發)이므로 대한민국 정부는 즉각적인 대한국(大韓國) 영토 주권(領土 主權) 불법(不法) 침해(侵害)의 시정을 촉구, 지도에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 북대한해(North Korea Sea)로 표기하고 국제수로기구(IHO)에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의 대한국(大韓國) 불법(不法) 침략(侵略) 전 대한해 大韓海 Sea Of Korea 단독(單獨) 표기(表記) 환원(還元)을 요구해야 한다. 독도(獨島)는 동도(東島:독도 이사부길), 서도(西島:독도 안용복길) 2개의 큰 섬,89개의 부속도서로 이루어졌으며 동도의 면적은 7만3297㎡이고, 서도의 면적은 8만8639㎡로 서도의 면적이 조금 더 넓다. 독도(獨島)는 우산도(于山島), 자산도(子山島), 삼봉도(三峰島), 요도(蓼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던 3한국(三韓國:신라(新羅)·고례(高禮:Korea)·백제(百濟))의 하나인 신라국과 고려국, 조선국, 대한국을 이어 통치해온 우리나라의 고유한 영토이다. 가지어(可支魚:강치)는 경상북도 울릉도, 독도(獨島)에 서식한 물개과에 속한 포유동물로 몸길이는 수컷 2.4m, 암컷 2.0m이며 몸무게는 수컷 390㎏, 암컷 110㎏이다. 헤엄치기에 알맞는 평평한 지느러미발을 갖고 있다. 코르크색이며 보통 가슴 부분의 빛깔이 더 진하고 솜털은 없다.수명은 약 25년이며 번식은 연 1회, 1마리를 낳는다. 임신 기간은 11개월이며 출산기는 5~6월이고 양육 기간은 10~12개월이다. 먹이는 어류와 연체동물류 등을 잡아먹으며 도서 및 연안 바위 지대에서 생활하고 계절에 따라 수백 킬로미터 이동하며 번식기에는 도서나 연안 바위 지대에서 출산과 양육을 한다. 수컷은 번식기 이외는 단독생활을 하며 암컷은 새끼들과 함께 집단생활을 한다. 울릉도, 독도(獨島)에 사는 가지어(可支漁:강치)에 대해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6월 26일 가지도(可支島)에 가서 보니 가지어(可支漁:강치) 너댓 마리가 놀라 뛰어나왔는데 생김새는 수우(水牛)를 닮았고 포수가 두 마리를 쏘아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19세기 초반 4만~5만 마리에 이르던 독도 인근 가지어(可支漁:강치)는 1904년 갑진늑약(甲辰勒約) 불법 늑결이후 독도(獨島)에서 157㎞나 떨어진 일본 어부들의 남획(濫獲)으로 1950년대 완전히 멸종(滅種)되었으며 일본이 1904~1956년에 걸쳐 43년간 가지어(可支漁:강치) 16,614마리를 남획(濫獲)하여 멸종(滅種)시켰다.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의 입비(立碑) 목적은 '於(是:廣開土太王陵)立碑 銘記勳積 以示後世 어시(광개토태왕릉)입비 명기훈적 이시후세' 로서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에 비석을 세워 고례(高禮:Korea - AD683년) 광개토태왕의 훈적(勳積)을 명기(銘記)하여 이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능비문(陵碑文)의 훈적(勳積)을 명기(銘記)한 문장의 주어는 당연히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며 굳이 능비문(陵碑文)의 매 문장마다 명기(銘記)할 필요가 없다. 고례(高禮:Korea)가 배반한 백제(百濟)를 적대시하여 낮춰 부르는 백잔(百殘)의 비칭(卑稱))에서 고례(高禮:Korea)의 백제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백제와 신라는 고례(高禮:Korea)에 속하는 옛 백성이었으나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4세기 고례(高禮:Korea),백제,신라 3한국(三韓國)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고 고례(高禮:Korea)의 향후 백제에 대한 강경정책을 예상할 수 있다. 백제(百濟)의 국력이 강성해져 고례(高禮:Korea)에 조공하지 않고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왜(倭:일본)를 제후국으로 삼았고 고례(高禮:Korea)는 옛 날 조공(朝貢)해오다가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는 백제를 괘씸죄를 적용해 응징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고례(高禮:Korea) 국왕 즉위 후 백잔(百殘:백제)의 제후국 왜(倭:일본)가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고례해(高禮海:Sea of Korea)를 건너오자 백제와 왜(倭:일본)에 대한 응징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고례(高禮:Korea) 왕(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잔(百殘:백제)과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고례해(高禮海:Sea of Korea)를 건너온 왜(倭:일본)를 격파(고례(高禮:Korea)를 배반한 백제 응징이 목적)하여 응징하고 백제,신라를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능비문(陵碑文)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百殘新羅 舊是(고례(高禮:Korea))屬民 (中叛不貢). / 由來朝貢(於百殘)而 倭以辛卯年來渡(高禮:Korea)海 / (廣開土太王) 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고례(高禮:Korea))속민(중반불공). / 유래조공(어백잔)이왜이신묘년내도해 / (광개토태왕) 파백잔여왜신라이위신민' 이다. '百殘新羅舊是(高禮)屬民 (中叛不貢). / 由來朝貢(於百殘)而 倭以辛卯年來渡(高禮:Korea)海 / (廣開土太王) 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일본군국주의가 일본에 유리하게 악의적으로 잘못 띄어읽고 해석한 능비문(陵碑文)의 문장을 올바로 띄어읽고 해석하여야 하며 일본에 불리한 '(廣開土太王) 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의 '與倭 新' 은 일본군국주의가 고의로 지운 것이다.백잔(百殘:고례(高禮:Korea)가 배반한 백제(百濟)를 적대시하여 낮춰 부르는 비칭(卑稱))과 신라는 (고례(高禮:Korea))에 속하는 옛 백성이었으나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 백잔(百殘)이 고례(高禮:Korea)의 백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고 왜를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받았으며 고례(高禮:Korea)가 백제 응징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것은 능비문(陵碑文)에 명기(銘記)하지 않았으나 문맥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중반불공(中叛不貢)이 4세기 고례, 백제, 신라 3한국(三韓國)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확인시켜주고 고례(高禮:Korea)의 향후 대 백제 강경정책을 예상할 수 있다. 백제(百濟)는 국력이 강성해져 고례(高禮:Korea)에 조공하지 않고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왜(倭:일본)를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았고 고례(高禮:Korea)는 배반한 백제를 괘씸죄를 적용하여 응징하려 하였다. 백잔(百殘:백제)의 제후국 왜(倭:일본)가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고례해(高禮海:Sea of Korea)를 건너오자 배반한 백제와 왜(倭:일본)를 응징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고례(高禮:Korea) 왕(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잔(百殘:백제)과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고례해(高禮海:Sea of Korea)를 건너온 왜(倭:일본)를 격파(고례(高禮:Korea)를 배반한 백제(百濟) 응징이 목적)하였고 백제,신라를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3한국(三韓國:고례,백제,신라)의 하나인 신라국(新羅國) 지증왕 13년(512)에 이사부(異斯夫)가 울릉도와 우산도, 죽서도(竹嶼島), 관음도를 아우르는 우산국(于山國)을 편입한 이래로 대한국의 영토가 되었고 조선국 초기에는 독도를 우산도ㆍ요도ㆍ삼봉도 등으로 불렀으며 세종실록에는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의 부속 도서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로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우산도를 울진현 소속으로 기록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강원도(江原道)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울진현(蔚珍縣) 조(條)에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울진현(蔚珍縣)의 동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국(新羅國)이 우산국(于山國), 또는 울릉도(鬱陵島)라 하였는데 지방(地方)이 1백 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智證王) 12년에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요리조리 헤아려 보고 생각해 낸 꾀 계교(計巧)로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국(高麗國) 태조(太祖)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白吉土豆)로 하여금 방물(方物)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毅宗) 13년에 심찰사(審察使) 김유립(金柔立) 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만여 보요, 서쪽으로 가기 1만 3천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만 5천여 보요, 북쪽으로 가기 8천여 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조선국(朝鮮國) 태조(太祖)조에 떠돌아다니는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三陟) 사람 김인우(金麟雨)를 명하여 민심 수습을 위하여 지방에 특사로 파견하는 안무사(安撫使)를 삼아서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찾아내는 쇄출(刷出)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김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1416년 9월 2일 조선국(1393-1897) 태종이 김인우(金麟雨)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의 민심 수습을 위하여 지방에 특사로 파견하는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 호조 참판(戶曹 參判) 박습(朴習)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 都觀察使)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울릉도(鬱陵島))의 둘레인 주회(周回)가 210리인 7식(息)이고, 곁에 독도(獨島)가 있고, 논과 밭인 전지(田地)가 50여 결(結)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 날에 방지용(方之用)이 15가(家)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때로는 왜구(倭寇)를 가장(假裝)하여 조선국 해변을 약탈하던 도적인 가왜(假倭)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三陟)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보게 하소서.”하니, 태종이 옳다고 여기어 삼척 사람 전 만호(萬戶) 김인우(金麟雨)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물었다. 김인우가 말하기를, “삼척 사람 이만(李萬)이 일찍이 무릉(武陵)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섬의 일을 자세히 압니다.”하니, 곧 이만을 불렀다. 김인우가 또 아뢰기를, “무릉도가 멀리 바다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한때 머물러 사는 주접(住接)하는 사람이 많으면 왜구(倭寇)들이 끝내는 반드시 들어와 도둑질하여 이로 인하여 강원도(江原道)를 남의 나라를 불법으로 쳐들어가는 침노(侵擄)할 것입니다.”하였다. 태종이 옳게 여기어 김인우를 우산도(于山島)와 무릉도(武陵島)의 안무사(安撫使)로 삼고 이만(李萬)을 높은 지위의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돕는 반인(伴人)으로 삼아 병선(兵船) 2척, 초공(抄工) 2명, 인해(引海) 2명, 화통(火通)·화약(火藥)과 양식을 주어 그 섬에 가서 그 두목(頭目)에게 일러서 오게 하고 김인우와 이만에게 옷·입(笠)·화(靴)를 주었다. 성종1(1470)년에 함경도 영흥(永興)에 사는 김자주(金自周)가 섬을 관찰해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삼봉도(三峰島)라 불렀다. 조선국(朝鮮國) 3대 국왕 태종 대에 왜국의 어부들이 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Dokdo)에서 불법적으로 고기를 잡아가자 안용복(安龍福)은 40여 명을 이끌고 울릉도,독도(獨島:Dokdo)에 들어가서 왜국(倭國) 어부들을 몰아내고 왜국까지 가서 막부(幕府)로부터 다시는 울릉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과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가 조선국(朝鮮國) 영토라는 서계(書契)까지 받아 왔다. 조선국(朝鮮國)은 독도를 자산도(子山島)라고 불렀으며 3년마다 관리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하였다. 정조18(1794)년에 영토를 조사하는 수토관(搜討官)으로 파견되었던 한창국(韓昌國)은 독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르고 바다사자인 가지어(可支魚)를 잡아 왔다. 1881년 5월 22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에서 고조(高祖Gojo:1863-1897)에게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江原 監司) 임한수(林翰洙)의 장계(狀啓)를 보니 ‘울릉도 수토관(鬱陵島 搜討官)의 보고를 하나하나 들면서 아뢰기를 간심(看審)할 때에 어떤 사람이 나무를 찍어 해안에 쌓고 있었는데 머리를 깎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 7명이 그 곁에 앉아있기에 글을 써서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일본 사람인데 나무를 찍어 원산(元山)과 부산(釜山)으로 보내려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왜국(倭國) 선박의 왕래가 근래에 빈번하여 이 섬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폐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통리기무아문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능묘(陵墓)를 보호하거나 특수한 목적을 위해 벌목(伐木)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해 특별히 지정한 산(山)인 봉산(封山)은 원래 중요한 곳이니 수토(搜討)하는 것도 정식(定式)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암암리에 나무를 찍어서 남몰래 실어가는 것은 변금(邊禁)에 관계되므로 엄격하게 막지 않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서계(書契)로 작성하여 동래부(東萊府) 입국한 왜인(倭人)들이 머물면서 외교적인 업무나 무역을 행하던 왜관(倭館)에 내려 보내어 일본 외무성(外務省)에 전달하게 할 것입니다.그러나 이 섬은 그 형세가 지세(地勢)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인 요해지(要害地)로서 어떠한지 방수(防守)를 빈틈없이 하는 것은 어떠한지 종합적으로 두루 살펴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부호군(副護軍) 이규원(李奎遠)을 울릉도 검찰사(鬱陵島 檢察使)로 차하(差下)하여 그로 하여금 가까운 시일에 빨리 가서 철저히 헤아려보고 의견을 갖추어 수계(修啓)하여 아뢰고 복계(覆啓)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1882년 4월 7일 고조(高祖:1863-1897)가 검찰사(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을 아랫사람을 불러서 만나는 소견(召見)하였다. 검찰사(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이 고조(高祖:1863-1897)에게 외직(外職)에 임명된 관원이 임금에게 하직 인사 올리는 사폐(辭陛)를 하였다. 고조(高祖:1863-1897)가 하교하기를, “울릉도(鬱陵島)에는 근래에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 때나 왕래하면서 제멋대로 편리를 도모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송죽도(松竹島)와 우산도(芋山島)는 울릉도의 곁에 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또 무슨 물건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번에 그대가 가게 된 것은 특별히 가려 차임(差任)한 것이니 각별히 검사하여 살피는 검찰(檢察)하라. 그리고 앞으로 읍(邑)을 세울 생각이니, 반드시 지도와 함께 별단(別單)에 자세히 적어 보고하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우산도는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芋山)이란 바로 옛날의 우산국의 국도(國都) 이름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0리(里)쯤 됩니다. 여기서 나는 물건은 단향(檀香)과 간죽(簡竹)이라고 합니다.”하였다. 고조(高祖:1863-1897)가 하교하기를, “우산도라고도 하고 송죽도라고도 하는데 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그리고 혹은 송도·죽도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이 세 섬을 통칭 울릉도라고 하였다. 그 형세에 대하여 함께 알아보라. 울릉도는 본래 삼척 영장(三陟 營將)과 월송 만호(越松 萬戶)가 돌려가면서 수검(搜檢)하던 곳인데 거의 다 소홀히 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저 외부만 살펴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었다. 그대는 반드시 상세히 살펴보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깊이 들어가서 검찰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송도와 죽도는 울릉도의 동쪽에 있다고 하지만 이 것은 송죽도 밖에 따로 송도와 죽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하였다. 고조(高祖:1863-1897)가 하교하기를, “혹시 그전에 가서 검사나 검열 따위를 받는 수검(受檢)한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있는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그 전에 가서 수검한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나 대체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하였다. 6월 5일 고조(高祖:1863-1897)가 울릉도 검찰사(鬱陵島 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서계(書契)와 별단(別單)은 이미 열람했고 지도(地圖)도 보았다. 산 위에 있는 나리동(羅里洞)이 넓기는 넓은데 단지 물이 없는 것이 흠이다. 그 속에 나무들이 하늘이 안 보이게 꽉 들어서 있던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나리동 산 위에 따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땅이 매우 기름져 온갖 산물이 많이 나는 천부(天府)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기슭에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크고 작은 냇물들이 모두 복류(伏流)인 것이 하나의 큰 흠이었습니다.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꽉 들어서서 종일 걸어도 햇빛이 새들어오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하니, 고조(高祖:1863-1897)가 하교하기를, “만일 고을을 설치한다면 서너 곳 중에서도 나리동이 적당할 만하다.”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진(鎭)이나 읍(邑)을 설치하자면 나리동이 아니고는 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골짜기 안에 300호(戶) 가량 들어앉을 곳이 왕왕 있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골짜기 안에 100∼200호 가량 들어앉을 만한 곳은 6, 7곳입니다. 그런데 개척한 후 여러 골짜기에 바다를 막을 곳이 없는 것이 결함입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뽕나무·산뽕나무·닥나무·모시풀이 심지 않았는데도 자생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모시밭은 무성하여 수십 이랑이나 되었으며 뽕나무·산뽕나무·닥나무 등속이 간간이 숲을 이루었으니 이것은 옛날 백성들이 살 적에 심어놓은 듯합니다.”하였다. 고조(高祖:1863-1897)가 하교하기를, “그 곳을 만약 거친 땅을 일구어 논이나 밭과 같이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드는 개척(開拓)하면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가겠는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뱃놈과 약재 상인들에게 시험 삼아 물어보니, 대부분 즐거이 따라갈 뜻이 있었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들어가 약재도 캐고 배도 만들던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호남인(湖南人)이 제일 많은데 전부 조선(造船)을 하거나 미역과 전복을 따며 그 밖의 타도 사람은 모두 약재 캐는 일을 위주로 하였습니다.”하였다. 하교하기를 “왜국인이 푯말을 박아놓고 송도라 한다는데 그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그들이 세워놓은 푯말에는 송도라고 하였습니다. 송도라 한 데 대해서는 이전부터 서로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1차로 하나부사 요시타다에게 공문(公文)을 보내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왜국 외무성에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이 내용을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時任) 재상들에게 이야기하여 주어라. 지금 보니 한시라도 등한히 내버려둘 수 없고 한 조각의 땅이라도 버릴 수 없다.”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이 전교를 일일이 총리대신(總理大臣)과 시임 대신(時任 大臣)들에게 알려주겠습니다. 설사 한 치의 땅이라도 그것은 바로 조종(祖宗)의 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 강토(疆土)인데 어떻게 소홀하게 보아 넘기는 등한시(等閑視)하여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단 저들에게 통지할 뿐만 아니라 개척하는 일도 속히 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개척에 있어서는 빨리 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여 모여드는 것을 본 연후에 조처할 수 있습니다.”하니, 고조(高祖:1863-1897)가 하교하기를, “배를 대어 사람과 짐이 뭍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부두(埠頭)는 형편과 경우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하는 변통(變通)할 길이 없던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온 섬에 둘러있는 여러 배가 드나드는 포구(浦口)가 돌과 자갈로 덮이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어떤 일을 시작하는 착수(着手)하는 것이 실로 용이하지 않습니다.”하였다. 6월 16일 3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울릉도 검찰사(鬱陵島 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이 일본인들이 한쪽 구석에 막을 치고는 송도라 칭하면서 나무 푯말을 세웠으니 공문을 띄워 잘못된 점을 따져 나무라는 힐책(詰責)하기를 계청(啓請)한 일에 대하여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었습니다. 왜국인들이 이 섬에 들이닥쳐 이 섬의 나무를 찍는 것을 그 나라에서 금지시키라는 내용으로 이미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찰사가 직접 가보고 그전과 다름없음을 목격하였다고 하니 부득이 저번과 같은 내용으로 다시 신칙하여 이 폐단을 영영 막아야 하겠습니다. 국왕의 교문(敎文) 또는 대외 문서를 관리하는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종2품 제학(提學)인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서계(書契)를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高祖:1863-1897)가 윤허하였다.7월 10일 3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울릉도 검찰사(鬱陵島 檢察使) 이규원(李奎遠)의 서계(書啓)에 대해 삼군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왜국 사람들이 침범하여 이 섬의 나무를 베는 것은 그 나라에서 금지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미 서계(書契)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검찰사가 가서 그들이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니 종전의 내용을 다시 신칙하여 이 폐단을 영원히 막아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2품 제학(提學)인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서계를 지어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고조(高祖:1863-1897)가 윤허하였다. 1899년 12월 15일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9) 내부 대신(內部 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뢰기를 “울릉도(鬱陵島)를 개척한 지 여러 해가 되어 호구가 늘어나고 토지가 점점 개간되는데 시찰위원(視察委員)을 임용하여 울릉도(鬱陵島)에 가서 일체 정형을 자세히 조사하는 동시에 주민들을 안착시키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돌보아주는 뜻을 보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大韓帝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Gojo Gwangmooje:1897-1919)는 칙령 41호(勅令 四十一號)를 제정하고 대한제국이 독도(獨島:Dokdo)의 주권국임을 전세계에 공포하였다.1895년 설치한 울릉도 도감을 강원도의 울도 군수로 승격시킨 대한제국 칙령 41호는 울도(鬱島:울릉도)군의 관할 구역을 울릉전도(鬱陵全島),죽서도와 석도(石島:독도)로 규정하고 있으며 죽도(竹島)는 울릉도 바로 옆의 죽서도(竹嶼島)이고 석도(石島)가 독도(獨島)이며 울도 군수가 울릉도,독도를 관할하였다. 1906년 울도(鬱島:울릉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은 우산도라 부르던 독도를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고한 공식 문서에서 독도(獨島:Dokdo)라고 처음 사용하였다. 돌섬을 음역하면 독도이며 의역하면 석도(石島)이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Korea)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를 표기한 고지도를 상설전시, 교육홍보하고 역사적,국제법적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확립하여 대한국(大韓國:Korea) 116년 역사를 바로세우고 일본 정부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Gojo Gwangmooje:1897-1919)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岳:북악산)과 목멱 (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봉행하고 대한국(大韓國)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신라(新羅)·고례(高禮:Korea)·백제(百濟)의 3한국(三韓國)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1897- )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4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1919년 3·1대한광복운동 후 4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국인 천여 명과 신한청년당이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으로 각각 의결함으로써 1919년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원년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1조에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으로 함’이라 천명함으로써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2차 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으며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를 선출했다.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법률안 의결, 임시 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은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國務員)을 구성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 행정수반인 국무총리(國務總理)에 이승만(李承晚)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 외무 김규식, 군무 이동휘, 재무 최재형, 법무 이시영, 교통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고 한성(漢城)에는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는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9월 상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고 이승만(李承晚)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 통치권자 국가 원수(國家 元首)인 대통령(大統領)으로 선출하였다. 한반도(韓半島:Korean Peninsula) 제주도 간도(間島) 대한해(Sea Of Korea) 독도(Dokdo) 울릉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국(大韓國)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도에서 중국이 이민족국가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건축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남동쪽 간도(間島)까지 남북으로 4천 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Gojo Gwangmooje:1897-1919)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시킨 울도군(鬱島郡)의 관할 구역으로 울릉도(鬱陵島),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 칙령(勅令) 41호는 울릉도(欝陵島)를 울도(欝島)라 개칭(改稱)하여 강원도(江原道)에 부속(附屬)하고 도감(島監)을 군수(郡守)로 개정(改正)하고 울도군(鬱島郡)이 울릉전도(鬱陵全島:울릉도)와 죽도(竹島), 석도(石島:독도)를 관할한다고 명시하였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1897-1919)는 일본군국주의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으나 일본군국주의는 1904년 2월 8일 한반도(韓半島:Korean Peninsula) 간도(間島)에서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대한국 도읍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불법(不法)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甲辰勒約)을 불법 늑결(勒結)하고 경운궁에 방화하였다.일본군국주의는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다.일본군국주의는 4월 14일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을 방화(放火)한 후 간도로 북진하였고 일본군의 방화(放火)에 의한 대화재로 대부분의 전각(殿閣)이 소실되어 원형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1906년 울도(鬱島:울릉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은 독도를 울도군(鬱島郡) 소속이라고 밝혀 독도(獨島)가 대한국의 영토이며 울도군에 소속된 행정관할구역임을 확인하였으며 1907년 6월 현성운(玄聖運)이 몇년여에 걸쳐 제작 완료한 대한전도(大韓全圖)와 현공렴(玄公廉)이 1908년에 제작 완료한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 대한해(大韓海)로 표기하였고 어렵게 학부(學部)의 검정을 받았다.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가 백두산 아래 갑산에서 함경북도 온성을 경유하여 녹둔도로 흐르는 바다인 북대한해(North Korea Sea)를 백두산에서 북간도로 흐르는 두만강으로 왜곡하였고 1910년 8월 대한국(大韓國) 영토를 불법(不法) 병탄(倂呑:illegal annexation)하고 대한시대 대한광복운동기(1906-1945)인 1929년 대한해(Sea Of Korea)를 일본해로 바꿨으므로 지도에 동대한해(East Korea Sea), 서대한해(West Korea Sea), 남대한해(South Korea Sea),북대한해(North Korea Sea)로 표기해야 하며 국제수로기구(IHO)는 ‘해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4판에 대한국령(大韓國領:Korean territory)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단독(單獨) 표기(表記)를 환원(還元)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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