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10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대나무 잎에서 피어난 사람들, 첫번 째 이야기 대나무 잎에서 피어난 사람들, 첫번 째 이야기 고암 이응노 화백은 68여 년 화업(1922~1989)을 이끌어가며 자신의 예술 시대를 6개 기간으로 나눴다. 20대에는 한국의 전통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모방을 주로 했던 시기였고, 30대에는 자연 물체를 사실주의적으로 탐구한 시대였으며, 40대는 반추상적인 표현 즉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思意的) 표현 시대였다. 50대는 유럽에서 추상화를 시작한 사의적 추상 시기, 60대는 서예적 추상시기라고 구분했다.(전세계 예술가들 중 이렇게 다양한 작품세계를 이끌어간 작가를 찾아보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이응노는 자신의 작품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11-15 16:22 이응노의 화첩들, 늘 새로운 자신을 기록하다 이응노의 화첩들, 늘 새로운 자신을 기록하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늘 자신을 기록했다. 이응노는 자신이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다양한 방식들, 형식들, 모양들을 남겼는데, 풍경 스케치, 신문 칼럼, 신문 삽화, 기행문 등이 있다. 그의 유년과 청년시절은 식민지 시대였고, 중년에는 조국해방과 한국전쟁, 군사정권의 시대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전후시대의 비극적 시대상과 세계 민주주의 운동의 흐름 등을 직접 경험하며 극도로 혼란한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늘 변화무쌍해가는 자신의 말과 생각과 그림들을 그러모으며 책을 만들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자신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 커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10-10 11:03 고암 이응노의 콜라주 작품 고암 이응노의 콜라주 작품 고암 이응노 화백은 196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며 파케티 갤러리(Galerie Paul Facchetti)와 전속계약(1961~1964)을 맺고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나 생활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다. 생활은 물론 작품의 재료 구입 또한 어려워지자 이응노는 그리다가 버린 한지, 신문지, 컬러 잡지들을 손으로 찢고 뜯고 붙이는 새로운 경향의 꼴라주 작품을 시도한다. 그리고 1962년 파케티 갤러리에서의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하며 그의 예술가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한다.콜라주는 프랑스어로 ‘풀칠하다’, ‘바르다’의 의미와 ‘무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9-28 08:30 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이응노의 문자추상의 탄생 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이응노의 문자추상의 탄생 고암 이응노 화백이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던 1960년대의 파리의 풍경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1940년대 이후 전쟁의 상흔을 입은 시민들의 정신적 신체적 상흔과 더불어 도시의 여러 곳에서는 전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유럽의 세계대전 이후의 미술은 전쟁의 상흔에 따른 암울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미술경향과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고 밝은 미래를 희망하는 미술경향 등이 나타나게 된다. 당시의 프랑스 파리는 새로운 도시 재건에 따른 새로운 건물과 폭격을 맞은 낡은 건물들이 공존하면서 빚어내는 멜랑콜리한 정서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8-15 08:30 붓은 조각 끌이 되고, 화선지는 나무가 되고 붓은 조각 끌이 되고, 화선지는 나무가 되고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세계는 서화를 근간으로 다양한 재료를 활용함으로써 예술 장르의 다양성의 추구할 수 있었고 지속적인 실험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응노는 1950년대 초반 자신이 추구하던 서화미학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장르의 다양성과 실험성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 이응노는 동아일보에 ‘경주 기행-신라예술의 기백’이란 제하의 기행문을 기고했는데, 경주지역 곳곳의 문화재들을 일일이 답사하며 그 감동과 열렬한 찬사를 가감 없이 고백하고 있었다. 특히 석굴암의 금강역사상, 보살상, 본존불 등의 조각물의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7-18 08:30 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동백림 사건과 옥중 작품들 고암 이응노의 삶과 예술, 동백림 사건과 옥중 작품들 1960년대 초반, 유럽전역에 자유의 물결이 들불처럼 번져 나아갈 때, 유럽발 민주화 열풍은 한국 군사정부에 큰 위협이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모략으로 1967년 ‘동백림(東伯林) 간첩단 사건’을 기획했다. 그리고 유럽에 거주하던 수많은 지식인을 대거 간첩혐의에 연루시켰고, 이응노는 ‘해외 국위 선양 예술인 초청 전시’라는 명분에 속아서 귀국을 종용당한 후 어떠한 법률적 변호도 받지 못한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된다.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동베를린 소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예술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6-15 08:30 ‘주역 64괘 차서도’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는 서예추상 ‘주역 64괘 차서도’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는 서예추상 고암 이응노 화백은 70여 년의 예술의 노정에서 일반적인 예술인들이 시도할 수 없는 예술형식의 대전환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예술형식을 창출하였고, 과감한 실천적 태도로서 전세계 예술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철학적 사유가 깊은 작품세계를 이끌었는데 특히 를 통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동양의 주요 경전 중 《주역》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문자로 여겨진다. 특히 고대 춘추시대 공자(公子)는 귀하게 여겨 받들었고, 중국 남송시대 주희(朱熹)는 《역경》이라 칭하며 숭상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5-09 08:30 고암 이응노의 기운이 생동하는 드로잉 고암 이응노의 기운이 생동하는 드로잉 일본 유학 시절 이응노는 문인화 전통에 표현의 답습을 벗어나 그림의 소재를 현실의 다양한 모습들에서 찾고자 했고, 필법도 세밀함을 기본으로 대상을 클로즈업해 사실적으로 그리는 방식 등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의 변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을 10여 년간 왕래하는 동안 고향 홍성을 비롯해 금강산 일대, 한강 주변, 경복궁 주변 등을 돌아다니며 산수풍경화를 비롯한 시장에 모여든 사람풍경, 일꾼들, 여성 누드, 소나 염소, 닭 등 동물들, 주변의 풀과 꽃, 나무 등을 사생하면서 대상을 관찰하고 사실적 표현능력을 키웠다. 이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4-11 08:30 동도서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융합하다 동도서기,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융합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전주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이응노는 서울의 해강 김규진 선생뿐만 아니라 호남지역 화단의 동강 정운면(東岡 鄭雲勉, 1906~1948)과 효산 이광열(曉山 李光烈, 1885~1966)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실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응노의 호(號) 죽사(竹史)를 지어주신 스승 해강 선생이 1933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별세한 이후로 이들과의 교류관계는 더욱 깊어졌을 것이며, 이후 규원 정병조 선생으로부터 호 고암(顧庵)을 받는 것에도 이들의 도움이 있었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3-15 08:30 서화용필동법론(書畫用筆同法論), 서법과 화법의 융합을 이루다 서화용필동법론(書畫用筆同法論), 서법과 화법의 융합을 이루다 이응노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전세계적으로 유명작가가 됐지만, 조국인 대한민국과는 여러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지면서 그의 삶과 예술세계 중 굴곡진 삶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1999년 한 해 동안 고암 이응노 화백의 10주기 추모전이 전국 주요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며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 집중 조명하게 됐고, 서울 평창동에 이응노미술관(2000~2005) 개관과 고암미술연구소가 설립되며 한국미술 고암 이응노 화백의 그림 이야기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4-02-11 08:33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