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25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의병항쟁과 부보상, 그리고 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 의병항쟁과 부보상, 그리고 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 1895년 11월 부보상들 수십 명 선비들과 합류 홍주성에 들어와3일천하 홍주성전투 서산·남양·대흥군수 수백 명과 홍주 향해홍주의병, 소작농민도 참여·동학교도 참여 사실 확인 어려워전기의병 이념 국수보복론·존화양이론·개화망국론·대일결전론 홍주의병의 병사층을 이룬 다른 집단으로 부보상이 있다. ‘의암유선생서행대략’에 “이조승이 장소(將所)의 영으로 부보상을 거느리고 청풍으로 갔다”고 한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이 서신 연락의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부보상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 초기 단계인 1895년 11월 28일에 부보상들이 수십 명의 선비들과 합류하여 홍주성에 들어왔으며, 이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12-10 09:15 의병의 발상지 왜, 하필이면 홍주 땅 이었을까? 의병의 발상지 왜, 하필이면 홍주 땅 이었을까? 의병운동은 국가위기에 민중이 일으킨 구국운동의 대표적 형태1910년 이후 의병, 독립군·광복군으로 연결 해외에서 독립투쟁홍주의병 홍주목에서 1905~6년에 걸쳐 전개된 일련의 의병투쟁홍주성전투 사망한 의병 수 최소 10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의병이란 국가 유사시에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의용병이다. 근대 한국의 의병은 일제 침략에 대항한 무력 항쟁의 대표적 세력으로 주로 유생, 전직 관료, 해산 군인 등이 지도부를 형성하였고 농민, 하급 군인, 도시 빈민층 등이 그 하부 구성원이었다. 한말 초기 의병 운동의 중심 세력은 이항로의 사상적 계보에 속하는 유생 의병으로, 이들은 개항기 개화에 대한 반대적 입장에서 척사 위정과 창의 호국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항로, 최익현 등의 지도로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12-09 14:22 홍주의병장 김복한 주도, 호서지역파리장서 17명 서명 홍주의병장 김복한 주도, 호서지역파리장서 17명 서명 호서지역 파리장서운동, 홍주의병장 김복한의 주도로 이루어져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마음으로, 김복한의 권유로 서명 진술4000년 역사의 민족 원한과 분함 조선인의 민족자존의식 역설만국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의 파리로 장서를 보내도록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대표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유림의 이름은 민족 대표에 빠져 있었다. 김창숙을 비롯한 영남지역 유생들은 33인에 유림 대표가 빠진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곽종석을 수반으로 하여 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이미 손병희 등이 선언문을 발표했으니 유림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립을 인정케 하자고 했다고 한다. 파리장서운동은 호서지역에서도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12-01 00:39 홍주동학농민군, 홍주의병으로 변모해 활동 계속 홍주동학농민군, 홍주의병으로 변모해 활동 계속 만해, 동학농민군과 의병이 죽는 모습 보며 벼슬을 않기로 결심아버지와 형이 동학농민군의 토벌과정에서 갈등 홍주의 집 떠나동학혁명·갑오경장에 비분강개 1896년 설악산 오세암으로 입산홍주성전투 퇴각한 동학군들 해미성에 집결한 인원은 3000여명 홍주의 동학운동사서 홍주출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의 관계에서 만해의 아버지 ‘한응준이 동학운동 당시 중군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에 주목한다. 한용운의 아버지와 형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에서 홍주의병을 일으켜 남포와 홍주를 점령하였으나 패했다는데 방점이 찍히는 대목이다. “동학농민군과 을미의병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충훈부도사라는 벼슬을 지낸 한용운(유천은 본명)의 아버지 한응준은 조정의 명을 받고 큰 아들 윤경과 함께 관군이 된다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11-18 13:53 홍주성 공격 실패한 동학군, 해미·면천성으로 퇴각 홍주성 공격 실패한 동학군, 해미·면천성으로 퇴각 동학군, 덕산서 작전회의 갖고 홍주성 공격 결행 추정돼홍주성전투, 홍주성 4대문과 빙고능선에 걸쳐 배치 격전동학군, 홍주성 서쪽 빙고능선 배치 일본군을 향해 공격동학군의 패배, 1년후 홍주의병이 봉기하는데 영향 끼쳐 1895년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2월까지도 동학도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일본군이 노린 것은 접주들이었으며, 동학을 초멸하려면 간부격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홍주의 동학군들은 예산으로 진입해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다리(삽교)쪽으로 옮겨가 이 일대를 점령하고 유숙했다고 한다. 1985년 11월 6일의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덕산의 삽교천변에 이르러서 보니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섬도 널려 있었다. 불을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11-14 15:26 공주 곰나루와 우금티고개, 그리고 송장배미 공주 곰나루와 우금티고개, 그리고 송장배미 동학군 공주감영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 웅진동 집결동학농민군 공주전투 대패, 농민운동 실패한 결정적 계기박산소 부근 전투, 농민군 수십 명 죽어 송장배미에 묻어공주, 단군신화처럼 곰과 관련된 곰(고마)나루전설 전해져올해로 동학농민운동 122주년을 맞았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제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제2차), 음력 9월의 전주·광주 봉기(제3차)로 나뉜다. 당시 농민들은 동학교조 최제우의 신원회복 문제 외에도 조선의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혼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1882년(고종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법에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2016-11-07 13:46 갑오농민항쟁의 땅 우금티, 의병사의 젖줄 금강 갑오농민항쟁의 땅 우금티, 의병사의 젖줄 금강 동학혁명 우금티 전투 견준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벌여홍주농민군·의병들 공주로 향하다 일본군에 처형된 곳동학농민군의 패배, 일본군의 농민군 대학살로 이어져송장배미, 우금티 전투 시체 산더미처럼 쌓여 묻은 곳 우리의 근대사를 안고 흐르는 금강(錦江)의 곰나루를 앞으로 밀고 있는 공주의 두리봉산과 의병(義兵)들의 행적을 좇는 길에 반드시 건너야할 강이 바로 금강이다. 금강은 의병사(義兵史)의 모태가 되는 젖줄이기도 하다. 금강에는 공주를 남과 북으로 연결하는 공주대교가 걸쳐 있는데, 근대사의 자주적 분기점을 연결하고 있는 ‘동학혁명(東學革命)’의 강도 금강이다.금강이 이고 있는 공주대교의 삼거리에서 부여방향으로 10~20분정도가면 금학동과 주미동의 경계에 있는 우금티(치)를 찾을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2016-11-05 16:20 보령 오천 녹도에도 항일투쟁의 역사가 숨 쉰다 보령 오천 녹도에도 항일투쟁의 역사가 숨 쉰다 녹도, 바다 내려다보는 언덕에 오밀조밀 하나의 동네 형성1907년 여름, 조선군·지방 진위대 해산된 병사들 의병항쟁홍주분견소 병사 6명 홍주성 탈출 옹암포에서 녹도로 향해일본군 녹도 섬 모두 불태워 주민들 토담집·뜸집 짓고 살아보령시 오천면 녹도(鹿島)리의 녹도는 섬의 모양이 사슴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녹도라 불리 워 진다고 한다. 녹도는 보령 대천항에서 25km의 거리에 있는 0.9㎢의 조그마한 섬이다. 녹도에 가는 길은 보령 대천어항이나 오천항에서 배를 이용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광천의 옹암포구(독배)에서도 배를 이용하여 갈 수 있었던 곳이다. 한때 120여 가구 300여명의 비교적 많은 주민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지금은 40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섬의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2016-10-17 12:08 홍주의병 이근주, 망국의 슬픔·통분 이기지 못해 자결 홍주의병 이근주, 망국의 슬픔·통분 이기지 못해 자결 이근주, 아들 봉로·손자 인세 등 3대 홍주의병·독립운동 투신을사늑약·경술국치 항거 자결 순국한 홍주출신은 이근주 유일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 8자, 가슴에는 유서가열사의 자결, 순국은 민족적 각성의 촉구와 민족정신의 표상 홍주(洪州)출신의 이근주(李根周) 열사는 을미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김복한, 안병찬, 이설 등과 창의할 것을 모의하는 등 독립운동과 의병활동을 도모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근주의 아들인 봉로(李鳳魯) 또한 육군상무사 활동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근주의 손자인 인세(李仁世)는 당시 대전공업대학을 다니던 중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징용돼 중국 남경에서 광복군에 가입하기 위해 징용을 탈출하여 광복군주둔지로 가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2016-10-06 19:50 홍주성 패퇴 의병 해미읍성 거쳐 줄포에서 항쟁 계속 홍주성 패퇴 의병 해미읍성 거쳐 줄포에서 항쟁 계속 홍주성전투 전사 의병 홍주성 밖으로 옮겨 어느 한 곳에 매장해미관아의 관원들 모두 의병에 가담했을 정도로 적극성 보여민종식 창의대장, 창의대장소 해미읍성으로 옮기고 재기 노려해미읍성 의병일행 광천 옹암포에서 배를 구해 전라도 줄포로 일본군은 1906년 5월 31일(음력 윤 4월 9일) 새벽 2시 30분경 총공격을 감행해 이날 새벽 4시경 홍주성을 완전 점령했다. 의병과의 1시간 30분에 걸친 전투 끝에 거둔 결과였다. 이후 일본군은 숨어 있는 의병들에 대한 전면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이때 사망한 의병의 숫자는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1912년 동경의 연산당에서 펴낸 ‘조선최근사(朝鮮最近史)’에는 약 80여명으로 기록돼 있으며, 부상자에 대해서는 기록돼 있지 않다. 아무튼 전사한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09-27 10:44 홍주의병 핵심인물 이설 등을 후원한 수당 이남규 홍주의병 핵심인물 이설 등을 후원한 수당 이남규 이남규, 홍주의병 결성과정서 핵심인물 안병찬·이설 등을 후원이설, 1878년 ‘의상척양왜소’서 강화조약 ‘항복조약’이라 통박패산하였던 동학농민군으로 하여금 항일의병에 참여할 수 있게홍주의병, 을미홍주의병과 밀접한 관련 있으며 그 전통을 계승 홍주의병은 거의 과정에서부터 해산 후 재기를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충청 호서지방의 유력인물이었던 수당 이남규가 시종일관 깊숙이 관계하고 있었다. 이남규는 1900년 비서원승을 끝으로 퇴관한 뒤 향리인 예산 대술에서 지내고 있던, 조야의 신망을 받던 우국지사였다. 이남규는 홍주의병이 결성되는 과정에서 핵심인물들인 안병찬과 이설(李偰) 등을 후원하였으며, 의병장 민종식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홍주의병이 패산한 뒤 잔여세력이 각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2016-09-13 17:48 홍주의병 중심인물 9명 대마도에 유폐시켰다 홍주의병 중심인물 9명 대마도에 유폐시켰다 홍주의병, 충남서부지역 항일세력 대규모 결집 집단 형성이토 히로부미, 광포하고 잔인하게 홍주의병 탄압을 자행홍주의병 9명, 사형을 종신형으로 낮춰서 대마도로 유폐홍주 9의사 대마도 유폐 20일, 호남의병장 최익현도 유폐 충청도 홍주(洪州)에서는 1906년 봄에 전 참판 민종식을 주장으로 삼고 의병이 일어났다. 김복한과 안병찬 등을 주축으로 일어난 전기의병의 전통을 이어 을사조약 늑결 이후 항일의병이 재기하였던 것이다. 홍주의병은 중기의병을 상징할 만큼 규모도 컸고 또 전투도 격렬하였다. 홍주의병은 충남 서부지역의 항일세력이 결집된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청양과 홍주를 중심으로 예산·부여·남포·보령 등지의 항일세력이 대거 결집된 형태였고, 청일전쟁 후 퇴거해 있던 전 참판 민종식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2016-08-26 11:32 창의기 꽂힌 홍주성, 피비린내로 물들다 창의기 꽂힌 홍주성, 피비린내로 물들다 의병들 홍주성에 창의기 꽂고 열사흘간 백병전으로 맞서홍주의병진과 일본군 홍주성 전투에서 처절한 싸움 벌여일본군, 삼광작전으로 민족의 정기를 말살시키고자 발악의병지도자들 만주·연해주로 이동 독립군으로 투쟁 전개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들은 홍주성에 창의기를 높이 꽂고 대오를 정비하면서 본격적인 수성(守城)작업에 돌입했다. 성을 점령한 이후 의병진을 개편한 민종식 의병장은 5월 31일 홍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어 패퇴할 때까지 연일, 혈전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일본군들이 홍주성을 빼앗기고 난후 다음날부터 홍주성 탈환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전하는 의병진에게 여러 차례 격퇴당하고, 더구나 10여명의 포로까지 생겨나면서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6-08-18 16:16 치열했던 홍주성 전투와 일본군의 의병학살 치열했던 홍주성 전투와 일본군의 의병학살 홍주목(洪州牧) 충청서부지역 관할 지방행정의 중심지홍주성전투 12일 동안 홍주의병 900여명 산화 추정?홍주성 일본인들 북문을 통해 덕산 쪽으로 모두 도망유병장 유준근 일기, 의병 300명 순국한 것으로 기록홍주는 충청도 서부지역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운주(雲州)로 불리다가 현종 3년(1012년)경에 홍주(洪州)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고, 현종 9년(1018년)에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가 확립되면서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조선 태종13년(1413년)에는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세조 원년(1455년)에 지방방위조직을 재편하면서 충청도 서부지역을 관할하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홍주는 지리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의 서쪽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7-28 11:10 보령 오천성에는 과연 대포가 있었을까? 보령 오천성에는 과연 대포가 있었을까? 남포 출발 의병들 보령 거쳐 광천~결성을 지나 홍주성 공격“의병들이 대포 2문과 신식 소총을 가지고 홍주성 공격했다”오천항 군선 100여척 정박, 수군 3000여명이 주둔했던 군항충청수영성은 충청도 해안방어의 최고 거점이며 수군 지휘부 남포성에서 홍주의병의 첫 승전보는 홍주성 승전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남포성 승리의 의미는 일본군과 관군에 대한 승리로 의병들로서는 무혈승리가 아닌 전투로서의 승리였기 때문에 여러 의미나 결과에서 수확이 컸다. 의병들서는 5일 동안의 싸움 끝에 거둔 승리였기때문에 전투경험과 함께 사기도 충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홍주성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으며, 정신적인 요소가 됐을 뿐 아니라 홍주성전투에서 끈질긴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7-14 09:50 남포성 전투에서 일본군 격파 첫 승전고 울리다 남포성 전투에서 일본군 격파 첫 승전고 울리다 비인-판교 거쳐 남포성 입성 때 의병 1만 여명으로 증가민종식 의진 남포성 나와 보령 거쳐 5월 19일 홍주성 쳐홍주성함락 체포의병 대마도 유배 ‘홍주의병 대마도9의사’홍주의병 남포성 5일 전투, 치열한 싸움 끝 첫 승리 거둬 나라를 구한 의병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참으로 야릇하게 아파온다.옛 흔적을 찾아 가는 곳마다 잡목과 수풀로 우거진 현장이고 보면 씁쓸함에 입맛이 쓰다. 또 다른 쓴맛은 민병(民兵)인 의병(義兵)은 조련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제대로 편제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높은 뜻과 기개를 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크고 작은 전투 경험에서 자신감이 생기고, 자생적 결집력과 전투를 통한 경험에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6-30 10:47 의병항쟁의 역사가 깃든 작은 섬 ‘소난지도 의병총’ 의병항쟁의 역사가 깃든 작은 섬 ‘소난지도 의병총’ ‘의병운동은 독립운동의 도화선’규정 1945년 광복 이끌어1906년 홍주의병전투 패한 의병들 소난지도 중심 활동해소난지도 의병 1908년 3월 일본경찰대 기습 공격에 전멸소난지도의병항쟁 당진지역 교직·사학자들 노력으로 발굴 충남 당진의 난지도는 대호방조제의 북쪽에 있는 섬으로 대난지도와 소난지도가 있다. 대난지도는 당진시에서 가장 큰 섬으로 여름철이면 난지도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이 많고 또 낚시터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물이 맑고 주변 환경이 깨끗해 갈수록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난지도로 들어가려면 도비도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도비도가 있는 당진으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송악나들목이 있는데, 이곳 송악나들목을 나오면 38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좌회전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6-16 11:32 을미·병오의병의 진앙지 홍주 땅과 홍주성 전투 을미·병오의병의 진앙지 홍주 땅과 홍주성 전투 30일 밤 동문근처 숲속 잠복 31일 기마병 폭발반 동문 폭파홍주9의사 8월6일 대마도유배 감금생활, 이토히로부미 지시이용규, 민종식 만나 재기추진, 이남규·충구 부자 체포 악형홍주성에서 물러나 6월 6일 당진 소난지도서 항일투쟁 계속 홍주성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면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5월 21일에 일본 경찰대에서 경부와 보좌원 순검 13명이 홍주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몇 차례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6-02 10:42 부여 지티에서 거병, 홍산-서천-남포-결성-홍주로 부여 지티에서 거병, 홍산-서천-남포-결성-홍주로 창의대장 민종식 합천전투에서 탈출, 보령 청라로 몸을 숨겨이용규, 여산에서 의진 결성 지치에서 민종식 의병장 재추대의병부대 남포성 5일간 전투 함락 성공, 병사 31명 의병진에홍주의병, 홍주성 점거한 직후 대규모 편제 갖춰 항일전 준비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의병들은 각지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4월 중순에는 공주에서 파견된 순검에 의해 강경포에서 의병 곽건순(郭建淳)과 심상관(沈相寬)이 체포되기도 했다. 한편 의병들은 5월초에도 남포군 일대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진위대장 이병은(李秉殷)이 5월 4일 군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남포군에 의병 400여명이 둔취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의병들은 남포와 홍산 일대로 집결했으며, 5월 9일(음력, 4월 16일)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5-19 10:33 병오홍주의병 청양 화성에서 첫 패배를 당하다 병오홍주의병 청양 화성에서 첫 패배를 당하다 하우령 고갯마루 병오의병주둔비 역사적 장소 증명홍주목사 이교석 ‘3일 뒤에 성을 잃게 된다’으름장안병찬 ·박창로 등 의병수뇌부 체포 정산의진 해산합천전투 패퇴 의병 홍주성(洪州城) 탈환을 준비해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병오홍주의병의 첫 기병지인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 하대장리 광시장터)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동의 초롱산을 넘어 홍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朝陽門) 밖 하우령(夏牛領, 지금의 하고개)에 진을 쳤던 것이다. 본래 초롱산이라는 이름은 초롱불을 밝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초롱산 아래 살았던 고려의 충신 이성(李晟)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 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 한관우 발행인 | 2016-05-04 10:36 처음처음12다음다음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