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지티에서 거병, 홍산-서천-남포-결성-홍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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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지티에서 거병, 홍산-서천-남포-결성-홍주로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5.1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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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7>

창의대장 민종식 합천전투에서 탈출, 보령 청라로 몸을 숨겨
이용규, 여산에서 의진 결성 지치에서 민종식 의병장 재추대
의병부대 남포성 5일간 전투 함락 성공, 병사 31명 의병진에
홍주의병, 홍주성 점거한 직후 대규모 편제 갖춰 항일전 준비

 

▲ 보령 남포성-홍주의병들은 남포에서 공주부에서 출동한 관군과 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여 남포성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다.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의병들은 각지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4월 중순에는 공주에서 파견된 순검에 의해 강경포에서 의병 곽건순(郭建淳)과 심상관(沈相寬)이 체포되기도 했다. 한편 의병들은 5월초에도 남포군 일대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진위대장 이병은(李秉殷)이 5월 4일 군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남포군에 의병 400여명이 둔취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의병들은 남포와 홍산 일대로 집결했으며, 5월 9일(음력, 4월 16일) 홍산군 지치동(支峙洞, 현재의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의 주막에서 의병을 재봉기하기에 이른다.

홍주의병이 광시로 집결하여 공주를 공격하기로 한 다음날인 3월 17일(음력, 2월 23일) 오전 5시에 일본군들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면서,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창의대장 민종식은 합천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보령군 청라면으로 몸을 숨겼다. 이곳 보령 청라에는 지산 김복한이 은거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으로 피신한 것이라는 설에 설득력이 더하는 대목이다. 이후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에 거주하는 친척 민진석(閔晉錫)의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조상수, 이세영, 이상구, 이봉학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곧이어 이용규가 초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용규는 합천전투에서 패한 뒤 전주·진안·용담·장수·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지치로 와서 민종식을 의병대장에 재추대 했던 것이다.
 

▲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일본 헌병들이 동문을 통해 덕산방면으로 도주하면서 의병들은 5월 20일 아침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했다.

■민종식 대장 재추대, 홍산-서천-남포로
민종식은 지치에서 다시 대장에 추대되어 부대를 정비하였다. 민종식은 이때 선봉장에 박영두, 중군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홍산 관아를 점령한 뒤 서천으로 행군하였다. 이튿날 비를 무릅쓰고 문장동을 거쳐서 5월 13일(음력, 4월 20일)에 서천읍에 도착하였다. 관아에 돌입한 의병부대는 서천군수 이종석을 감금시키고 양총 70여정을 획득하였다. 이 기세를 몰아 비인을 함락하고 남포로 가던 도중에 일본인 한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의 의병활동이 군산의 일본영사관이 경무총장에게 올린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당지에서 약30리 떨어진 서천에서 의병이라 칭하는 폭민 150여명이 총기를 휴대, 군아를 습격하여 금품을 약탈하고 군수를 납치하였다가 비인에서 이를 풀어주고 남포방향으로 진행했다는 형적이 있다. 본방인 3명이 조난한 모양이 있어 현상을 조사 중에 있다.”고 의병의 서천군아 습격 사건에 대해 통감부 문서에 기록하고 있다.

홍주의병은 남포에서 공주부에서 출동한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남포의 관군은 공주부의 관군과 합세하여 요새인 남포성을 의지하여 반격하였다. 5일간이나 전투가 이어졌으며, 의병부대는 남포성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던 것이다. 이어 민종식 의병은 보령으로 이동하였고, 보령에서는 보령군수 신석구(申奭九)를 통해 의병들을 모집하였으며 양총과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무렵 보령의 우국지사 유준근(柳濬根)이 유생 의병인 유회군(儒會軍) 33명도 영입하였다. 의병부대는 남포부근의 용동(龍洞)에서 일본인 석공 2명을 체포하여 그중 한명을 총살하기도 했다.

■홍주의병, 광천-결성-홍주성 공격 점령
이후 홍주의병은 광천을 거쳐 결성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낸 뒤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왔다. 홍주의 삼신당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의병부대는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의병은 남문에서 일본 헌병과 총격전을 벌였으며, 오후에는 서문으로 부대를 진격시키자 일본 헌병들이 동문을 통해 덕산방면으로 도주하였다. 드디어 의병들은 5월 20일 아침에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 신문천(申文千)과 천학순(千學順)이 하수구를 통해 홍주성에 들어가 4대문을 열어 의병들의 입성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의병은 5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의병들은 홍주성을 점령한 이후 총기와 탄약, 우편국에 있던 금품을 확보하였다. 홍주성을 함락시키자 신보균, 신현두, 이식, 안항식, 김상덕, 유호근 등 각지의 인사들이 차례로 집결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이때 해미군수만이 포군 10명과 약간의 군자(軍資)를 보낸 것으로 나와 있다. 또한 민종식이 체포된 후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고종에게 올리는 상주문을 작성하여 이민학(李敏學)에게 줘 고종에게 올리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상주문의 내용에는 을사 5적과 이등박문을 주륙할 것을 포함시켰으며, 거병한 이유를 들면서 거의(擧義)한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하지만 이민학이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이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홍주의병에 대한 고종의 태도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은 의병들의 홍주성 점령소식을 듣고 나서 ‘의병이 의로움을 지켰다면서 의병의 명문을 인정한 것’이다. 아울러 ‘의병을 늑멸(勒滅)해서는 안 되고 효유할 것’을 지시한데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라 관군의 적극적인 진압은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군의 대응은 철저한 군사적 진압작전이었다.

■현재의 홍주, 일제에 의해 홍성으로 개명 충남도청소재지로 변모해
현재 홍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일제 강점기 공주와 홍주의 일본식 발음이 비슷하다는 억지를 구실로 지난 1914년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쳐 지금의 충남 홍성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제 홍성은 뱃길, 철길, 땅길이 두루 열린 서해안의 중심지이며, 지금은 홍성군 홍북면의 내포신도시에 충청남도청 등이 이전해 충남도청소재지가 됐다.
“슬프도다. 일본이… 을미 8월에 우리 국모를 시해하였다. 을사 10월에는… 공갈 협박하여 강제로 5조약을 성사시켜 국권을 침탈하여 우리를 노예로 삼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하고 … 병오년(1906) 봄에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4월18일 홍산(현 부여군)에 모여 서천으로 들어가 총·포·탄약을 취하고… 보령을 지나 결성(結成)에서 묵었다. 26일에 홍주성에 들어가 주둔하니 총을 멘 군인이 600여 명, 창을 잡은 병사가 300여 명, 유회군 300여 명 등 1200명에 달했다”고 홍주의병장 민종식 판결문에 기록된 일부 내용이다. 이밖에도 일반인들로 의진에 합류한 숫자도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으로 쉽게 추정할 수 있다. 홍주성을 점거한 직후 이처럼 세력을 보였던 홍주의병은 다음과 같이 대규모의 편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항일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대장: 민종식(閔宗植) △참모장: 김광우(金光佑), 조희수(趙羲洙), 채광묵(蔡光默) △중군장: 정재호(鄭在鎬), 황영수(黃英秀), 이세영(李世永) △선봉장: 이남규(李南珪), 박영두(朴永斗) △좌익장: 이상구(李相龜) △우익장: 신현두(申鉉斗) △후군장: 정해두(鄭海斗) △유격장: 채경도(蔡景燾), 김광현(金光鉉), 윤상배(尹相培) △돌격장: 남계원(南啓元), 안병림(安炳琳), 곽한일(郭漢一) △좌우소모장: 최상집(崔相集), 엄순영(嚴淳榮) △소집장: 지우범(池禹範) △소모관: 이만식(李晩植) △수문장: 최선재(崔璇在) △수성장: 조병순(趙炳舜) △좌군관: 윤필구(尹弼求), 윤병일(尹炳日), 홍순대(洪淳大) △우군관: 이병년(李秉年), 이범구(李範九), 송순묵(宋淳默) △서기: 문석환(文奭煥) △참모사: 안병찬(安炳瓚), 박창로(朴昌魯), 안항식(安恒植), 신복균(申復均), 이식 △운량(運粮): 박제현(朴濟賢) △향관(餉官): 박윤식(朴潤植) △유병장(儒兵將): 유준근(柳濬根) △유병소향관(儒兵所餉官): 민정식(閔廷植)
이렇듯 한말 일제의 총칼이 우리 조선의 심장을 겨누자 홍주벌에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이 들불처럼 타올랐던 것이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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