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4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기나긴 무명 화가 시절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기나긴 무명 화가 시절을 넘어 다시 일어서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대나무 작품 으로 첫 입선을 한 이응노는 더욱 맹렬하게 그림 그리기에 매진한다. 스승 해강 김규진의 고된 집안일과 문하생으로서 그림 수련을 동시에 해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지만, 고암의 부지런함과 꿈을 향한 의지로 1여 년 정도를 버텨냈다. 그러나 고된 집안일로 인해 그림 그릴 시간이 부족했고 창작활동에만 오롯이 전념하기 위해 스승의 문하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선전에서 초입선한 경력뿐인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없었다. 떠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필요한 그림을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5-11 08:30 화가의 꿈을 향한 출가, 고된 문하생 시절 화가의 꿈을 향한 출가, 고된 문하생 시절 1920년 즈음 소년 이응노의 그림 솜씨는 동리(洞里)에서 제법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다. 아버님 강권에 못이겨 학교를 자퇴한 후 농사일과 집안일을 돕는 틈틈이 병풍을 그리고, 갓집, 빗접고비 빗접(머리 빗는 도구를 담아두는 기구)에 꽃이나 새를 그려 넣어주며 어려운 살림을 도왔다. 그리고 그때 당시, 도제식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던 이응노는 체계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염재 송태회(宋泰會) 선생께 사사했으나, 이 배움도 잠시, 여러 사정으로 곧 그만두어야 했다. 그림 그리기를 반대하던 유학자 집안의 명분과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4-13 08:30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이응노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어린 이응노 고암 이응노 화백이 태어날 무렵의 대한제국시기는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일본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1904.2.), ‘한일의정서(1904.2.)’를 강제 체결케했으며, ‘제1차 한일협약’(1904.8.), ‘제2차 을사늑약(1905)’에 의해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되자 자주적 개혁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은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뜻있는 민중은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을 통해 쇠퇴한 나라를 구하려 목숨을 내걸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 이응노 화백은 1904년 음력 1월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의 유학자 집안에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3-09 17:58 늘 새로움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한 예술가 늘 새로움을 향해 끝없는 도전을 한 예술가 충남 홍성군을 대표하는 훌륭한 역사 인물 중 문화예술인으로서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이 있다. 화백은 한국과 유럽에서 활동했던 당시에도 한국 미술사와 더불어 유럽 미술사에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예술가로 예우를 받았고, 사후인 현재에도 한국근현대화단을 대표하는 훌륭한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고암 이응노 화백은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에서, 여항문인 집안의 부친 이근상과 모친 김해 김씨의 슬하 5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고, 애국지사 이근주 선생(1860~1910)의 조카가 된다. 화백의 삶과 예술세계에서 불의 고암의 삶과 예술여정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2023-02-18 08:34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