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25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만해 선양사업, 지자체협력 독립정신의 길 함께 찾다 만해 선양사업, 지자체협력 독립정신의 길 함께 찾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한용운 탄생 140주년이자 열반한지 75주년의 해만해 한용운 선양사업 추진, 관련 자치단체들 상호협력 필요의견 대두돼전국에 흩어진 만해 관련 콘텐츠, 관련 지자체와 공유·체계화 사업 추진역사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선양사업은 지방자치시대 국가·자치단체의 몫근대 한국사에서 3·1독립운동은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다. 3·1독립운동은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제1차 대전 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재편성을 시도하던 때에 세계사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으려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일제는 강점 후 기만적인 선전을 일삼았다. 한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하지 않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10-06 09:08 만해 최초의 참선수업·첫사랑 시작된 곳, 금강산 건봉사 만해 최초의 참선수업·첫사랑 시작된 곳, 금강산 건봉사 사명대사 승병훈련, 공양할 쌀 씻은 물 개천 따라 10리 넘게 흘러‘화엄경’과 반야부 제경의 이력 채우고, 법명도 봉완에서 용운으로만해 1907년 건봉사에서 첫사랑인 서여연화 보살과의 사랑 시작돼조선불교유신론, 승려 결혼주장 만해와 서여연화의 관계 반영 평가금강산 건봉사(乾鳳寺)는 강원도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천년 고찰이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9-29 09:04 만해 한용운, 불교 승려로 원적을 둔 설악의 신흥사 만해 한용운, 불교 승려로 원적을 둔 설악의 신흥사 선정사 옛터 아래쪽 10리 지점에 절을 짓고 ‘신흥사(神興寺)’라 함1912년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의 말사 ‘신흥사(新興寺)’로 고쳐 부름한용운, 서여연화와 외설악 신흥사에서 한 때 동거했던 경험이 있어만해 서여연화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을 긍정해, 이것이 ‘님의 침묵’설악산은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나뉜다. 외설악에 위치한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 (652년)에 자장율사가 세워 처음에는 ‘향성사(香城寺)’라 불렀다. 이후 여러 차례 불에 탄 것을 조선 16대 인조 22년(1644년)에 영서(靈瑞), 연옥(蓮玉), 혜원(惠元)이라는 세 스님이 똑같은 꿈을 현몽해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신의 계시를 받고 세웠다 해 ‘신흥사(神興寺)’라 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 주조한 140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9-24 09:07 만해, 한 순간에 깨달음 얻고 오도송 남긴 오세암 만해, 한 순간에 깨달음 얻고 오도송 남긴 오세암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五歲庵)은 만해 정신의 고향과 다름없는 곳오세암, 님과 나의 이별과 만남 주제로 ‘님의 침묵’을 집필한 장소만해,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 순간에 깨달음 얻어설악산 백담사와 오도처인 오세암은 만해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곳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은 돌연 바랑을 꾸려 백담사(百潭寺)로 향한다. 1897년 열아홉 살의 한용운이 의병의 실패로 고향인 홍주를 떠나 처음 몸을 피했던 곳이고,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1905년 1월 26일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그리고 ‘님의 침묵(沈默)’ 등과 같은 명저들의 산실이니,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五歲庵)은 만해 정신의 고향과 다름없다.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9-11 09:09 인제 만해마을, 한용운의 사상 선양 위한 실천의 장 인제 만해마을, 한용운의 사상 선양 위한 실천의 장 만해 한용운의 문학정신과 자유사상, 진보사상, 민족사상 선양시벽(詩壁), 작고시인 50명, 생존 시인 100명 작품 동판에 새겨만해광장, 500~600명 야외행사 할 수 있는 반원형의 열린 공간만해마을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세계적 만해축전이 열리고 있어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136-5에 위치하고 있다. 대지 1만 7450㎡위에 건축 면적 2562㎡로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다. 건물들의 앞뒤에는 내린천 상류인 북천과 설악산 자락인 안산이 자리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산을 등지고 물이 앞에 놓인 형태)의 지형이다. 만해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탈고한 지 78년, 1944년 입적한 지 59년이 흐른 지난 2003년 여름, ‘설악산 자락의 무거운 그림자’를 헤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 기자/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9-01 09:07 첫 출가한 백담사, ‘님의 침묵’ 집필한 마음의 고향 첫 출가한 백담사, ‘님의 침묵’ 집필한 마음의 고향 대청봉에서 절까지 계곡의 웅덩이가 100개나 있다고 해서 백담사만해 ‘님의 침묵’과 ‘불교 유신론’ 집필하며 독립정신 깨달은 장소199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만들고 1999년부터 ‘만해축전’ 개최만해마을, 만해정신 되새기는 만해 한용운의 ‘성지(聖地)’로 거듭나강원도 인제의 백담사는 피안(彼岸)의 사찰이다. 오르는 계곡은 피안의 세상을 여는 아늑한 통로다. 백담사는 또한 만해(卍海) 한용운 선사의 절이기도 하다. 깊은 인연 때문이다. 20세 때 처음 백담사를 찾은 만해 스님은 25세 때 다시 백담사에 들어와 이듬해 이곳서 출가했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 ~1944)의 유적지는 크게 세 곳을 꼽을 수 있다. 출생지인 충남 홍성과 처음으로 출가한 백담사, 그리고 만년을 보낸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8-24 09:02 만해 ‘불교대전’ 간행한 범어사, 부산 첫 3·1만세 주도 만해 ‘불교대전’ 간행한 범어사, 부산 첫 3·1만세 주도 범어사, 신라가 통일을 이룬 668년보다 10년 늦은 678년 창건해만해 한용운과 인연,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란 뜻의 선찰대본산만해, 1914년 범어사서 ‘불교대전’ 간행, 대중불교 실현 위한 초석부산 최초 독립만세운동, 3월 7일 범어사 스님들을 주축으로 시작신라가 통일을 하고 대내외적인 안정을 찾아 갈 무렵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왕은 의상대사와 함께 금정산에서 7일 밤낮으로 불사를 올렸고, 마침내 ‘칼이 비처럼 내렸고 흙과 돌이 비처럼 흩뿌려 왜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상대사로 하여금 절을 짓도록 한 것이 바로 부산 범어사이다. 문무대왕은 동해바다에 수중릉에서 신라를 지켰고 의상대사는 바다와 인접한 산인 금정산에 범어사를 개창해 조국을 지킨 것이다. 범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8-11 09:06 만해 한용운, 양산 통도사서 고려대장경 6800권 열람 만해 한용운, 양산 통도사서 고려대장경 6800권 열람 만해, 출판 사업을 통한 불교 대중화와 의식개혁 운동을 펼쳐불교 교리를 일반대중 위해 소개할 수 있는 쉬운 개론서 필요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 열람, 현대적 언어로 변용해 요약‘불교대전’은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밝힌 불교개혁 의지의 산물신라 선덕왕 15년인 서기 64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경남 양산의 영축산 통도사는 원래 아홉용이 살았던 연못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연못의 흔적은 대웅전 옆 구룡지(九龍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북의 축을 가진 일반적 가람배치와는 달리 동서로 긴 통도사는 상로전, 중로전, 하로전으로 나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심적인 특징은 부처님의 정골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이기 때문에 대웅전에 불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대웅전 바로 뒤에는 진신사리를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8-05 09:06 편백나무 세 그루와 만해 항일독립의 본산 사천 다솔사 편백나무 세 그루와 만해 항일독립의 본산 사천 다솔사 사천 다솔사 안심료 앞 편백나무 세 그루, 만해의 회갑기념으로 심어1930년 만든 항일독립 지하조직 만당(卍黨),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서만해, 다솔사에 만당 조직 불교청년동맹 통해 독립운동·불교개혁 주도만당 해외에도 조직 대중운동 전개,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이 역할 맡아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2019년에 찾은 경남 사천의 다솔사는 고즈넉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자유와 평등, 인권의 가치를 지향한 근대시민정부의 구성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적 뿌리다. 3·1 독립운동의 주인공인 만해 한용운은 1918년 ‘유심’을 창간하고 다양한 인사들을 접촉하면서 윌슨의 민족자결선언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도모한다. 평소 친분이 있던 천주교의 최린,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7-29 09:04 만해 사상 선양의 열정이 담긴 곳,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만해 사상 선양의 열정이 담긴 곳,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남한산성 만해기념관, 1980년 성북구 심우장에 설치된 자료관에서 출발소화(昭和) 글자 불태우고 “소화(昭和)를 소화(消火)해 버리니 시원하군”일제 황민화정책·창씨개명운동·조선인 학병출정 반대했던 북향집 심우장만해 한용운의 호칭, ‘선사’로 통일해야 한다는 불교계의 입장이 정해져만해 한용운 선사의 유품과 자료가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남한산성 만해기념관(관장 전보삼)’이다. 이곳은 ‘만해 사상 선양’이라는 전보삼 관장의 필생 원력이 담겨 있기도 하다. 만해기념관의 시작은 1980년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 설치된 자료관에서 출발한다. 전 관장은 당시 한양공고 야간부 교사로 재직하며 낮에는 만해 연구와 자료관 관리를, 밤에는 교편을 잡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7-22 09:06 만해 한용운 잠든 망우공원 유택… 근현대역사박물관 만해 한용운 잠든 망우공원 유택… 근현대역사박물관 망우리 공동묘지, 40년 공동묘지 1973년 3월 신입 매장 중단묘역단지 사이 아스팔트 포장 울창한 숲공원 젊은이들에 인기만해 한용운 묘소 2012년 등록문화재 제519호 문화재청 등록만해, 심우장서 66세로 열반 미아리화장터 다비 망우공원 안치서울 중랑구에 있는 ‘망우공원’은 우리에게는 ‘망우리 공동묘지’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서울시 중랑구와 경기도 구리시 사이에 걸쳐 있는 ‘망우산(忘憂山)’에 조성돼 있는 공동묘지이기에 붙은 명칭이다. 망우산은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사후에 묻힐 장지 위치를 ‘건원릉’에 정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이 산의 언덕에서 ‘이제 오랜 근심을 잊게 됐다(忘憂)’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인근 지역의 지명도 ‘망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7-15 09:01 만해, 세상을 떠난 곳 서울 성북동의 북향집 ‘심우장’ 만해, 세상을 떠난 곳 서울 성북동의 북향집 ‘심우장’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도 바느질 하면서 만해 뒷바라지한 부인 유씨서울시 기록물이던 심우장,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0호로 승격돼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 바라보이기에 심우장 북향으로 주춧돌서대문형무소서 옥사한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5일장 심우장서 지내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만해 선사의 75주기를 기리는 추모다례가 기일인 지난달 29일 봉행됐다. 재단법인 선학원(이사장 법진)과 정법사, 성북문화원(원장 조태권)은 만해 선사의 기일인 6월 29일 오전 11시 심우장에서 추모다례를 봉행했다. 이번 행사는 국가보훈처와 성북구, 만해 한용운선양사업지방정부행정협의회가 후원했다. 이번 추모다례는 심우장이 지난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지정된 이후 처음 맞는 추모행사여서 그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7-09 09:03 만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독립정신의 정수 만해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독립정신의 정수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만해 독립담론 구체적 용해된 저술만해 옥중선언서 ‘조선독립 감상의 대요’ 제목으로 독립신문에 실려중앙학림 청년승려, 상해임시정부~국내 불교계 연결 통신운동 전개민족대표 만해 한용운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은 일제에 피체돼 수감됐다. 만해 한용운이 옥중에서 전개한 또 다른 항일운동은 ‘조선독립의 서’라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이다. 1920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서 전하는 ‘한용운의 공소 공판기’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가 나타난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는 만해 한용운이 1919년 7월 10일 옥중에서 일본인 검사의 요구에 의해 작성한 옥중 독립 선언문으로 꼽힌다. 옥중에서 아무 참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6-29 09:06 만해, 형무소에서도 당당했던 ‘민족독립의 자존심’ 만해, 형무소에서도 당당했던 ‘민족독립의 자존심’ 만해 3·1운동 민족 대표들에게 옥중 투쟁 3가지 원칙 제안·주장일본인 검사 심문에 만해, “조선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뿐” 주장만해, 옥중서 지조 지키고 재판에서 의연히 독립사상 마음껏 개진철창마저 수행처로, 만해의 담대함·당당한 기개 후세들 본받아야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픈 민족사의 굴곡을 간직하고 있다. 1907년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착공, 다음 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후 80여 년 동안 약 35만 여명을 수감하며 숱한 민족의 수난사를 잉태했던 곳이다.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민주화운동인사·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6-24 09:06 만해, 독립선언서 낭독했던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만해, 독립선언서 낭독했던 삼일독립선언유적지 서울시, 인사동 태화관 터에 올해 ‘독립선언 33인 광장’ 조성3·1운동 알린 앨버트 테일러 한국거주 ‘딜쿠샤’ 2020년 완료중종 때 순화공주의 궁터, 매국노 이완용 별장으로 꾸몄던 곳한용운 등 민족대표, 을사늑약·경술국치 무효화 의미로 선택해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에서 만해 한용운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은 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의지가 담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날 오후 탑골공원에서도 독립을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목 놓아 외쳤다. 하루 전날 천도교 중앙대교당에 숨겨뒀던 2만1000여 장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는 시민들의 손에서 손으로 퍼져나갔다. 본격적으로 만세운동을 펼쳤던 여정은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우뚝 서 있는 회화나무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6-17 09:06 만해, 조선 고유의 임제종 창립 통해 선학원 설립 만해, 조선 고유의 임제종 창립 통해 선학원 설립 신간회, 민족주의·사회공산주의 반일민족유일당운동단체만해 한용운, 선학원 태동부터 건립이념까지 깊숙이 관여정인보 “인도에는 간디가 있으며,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홍명희 “7000 승려를 다 합해도 만해 1인을 당하지 못해”서울 종로 안국동 40번지 선학원 중앙선원. 이 건물은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습만 달라졌을 뿐 그 위치에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선학원은 근현대 선지식들 대부분이 이사장을 지냈을 정도로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점이다. 선학원은 1921년 5월 15일 서울 간동포교당(諫洞布敎堂) 보살계 계단에서 설립의 서막을 열었다. 그해 8월 10일 기공을 거쳐 4개월 뒤인 11월 30일 준공됐다. 선학원이 건립되기까지 만해 한용운 선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6-10 09:02 만해, 1918년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 창간 만해, 1918년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 창간 만해, 계동 43번지에서 ‘유심’ 창간 인쇄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만해 한용운, 잡지 ‘유심’을 통해 대중들의 의식 계몽시키려 했음만해 ‘유심’을 단순히 불교교양지 아닌 종합잡지 만들 생각 추정“계동 43번지 만해 한용운 옛집은 지금 아무런 문화재도 아니다”만해 한용운은 1918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했다. 서울 종로구 계동 43번지에 ‘유심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는 최남선이 운영하는 신문관에서 했다. 1918년 10월에 2호, 12월에 3호까지 발간했다. 이미 ‘정선강의 채근담’과 ‘불교대전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5-30 10:49 만공, 참선의 ‘마음정토’ 만해, 현실참여 ‘현실정토’ 만공, 참선의 ‘마음정토’ 만해, 현실참여 ‘현실정토’ 덕숭산 수덕사는 근대의 선풍을 일으킨 경허와 만공 스님의 활동무대만공탑 ‘세계일화(世界一花)’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문구 새겨져만해 1910년대 ‘조선불교유신론’서 ‘승려 대처론’ 주장, 유숙원과 재혼만해, 일본의 불교정책에 맞서 비타협으로 승려생활을 한 만공을 존경충남 예산에 있는 덕숭산은 명찰 수덕사를 품고 있다. 덕숭산의 수덕사는 근대 선풍을 일으킨 경허와 만공 스님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을 오르는 길에는 만공 스님의 사리 무덤인 ‘만공탑’이 있다. 만공이 1946년 76세로 입전한 뒤 제자인 박중은 선사가 설계해 1947년 세운 우리나라 처음의 현대식 부도이다. 불교의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받침대 위에 불·법·승 삼보를 뜻하는 삼각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법호인 만공(萬空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5-26 09:09 철조망에 갇힌 한용운 부모 묘소와 한보국 삶의 복권 철조망에 갇힌 한용운 부모 묘소와 한보국 삶의 복권 한보국, 홍성사회에서 한용운의 아들로 다 알았고, 호인으로 통해6·25 때 한보국으로 인해 희생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한일은 없어한보국 큰 딸 명숙 홍성 떠날 때 열세 살, 넷째 딸 홍성서 태어나한용운·보국에 대한 조명 홍성사회에서 복권돼야 할 필요성 제기돼“한보국은 전쟁나기 전에는 원래는 호인으로 소문났어요. 그거는 저의 선친하고 친구니깐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저로서는 인상은 좋았어요. 928수복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나서는 한보국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쁜 놈이라고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다만 몇 사람은 호인으로 알다가 그 사람의 사상이 그런 줄은 몰랐다. 그렇게 골수 좌경분자인줄은 몰랐다고는 말했어요. 홍성지역사회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5-20 09:04 만해 아들 한보국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 유언 만해 아들 한보국 “통일 후 조상 묘에 성묘하라” 유언 한보국, 중도적인 사회주의 중도우파 민족주의 세력과 제휴 국가건설1945년 10월 ‘홍성군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한보국 위원장으로 활동충남농민동맹위원장 지내, 9·28서울수복 때 의용군 따라 가족과 월북김일성 1964년 한보국에 환갑상, 독립운동가의 후손 존재 알리게 해한보국이 이끄는 ‘가야동지회’는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을 발표하는 방송을 직접 듣고는 바로 다음날 최명룡과 유승준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대책을 협의했다. 당시 모임에서 한보국 등은 해방을 축하하는 군민대회 개최 준비를 위해 ‘전홍성민중대회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준비를 거쳐 8월 18일 홍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군민의 해방축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군민대회에서 한보국은 경과보고를 했다. 홍성지역의 해방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흔적 따라 5000리 길을 가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2019-05-13 09:05 처음처음12다음다음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