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1918년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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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1918년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 창간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5.30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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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
만해 한용운이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 창간한 종로구 계동 43번지의 유심사 터. 지금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있다.

만해, 계동 43번지에서 ‘유심’ 창간 인쇄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만해 한용운, 잡지 ‘유심’을 통해 대중들의 의식 계몽시키려 했음
만해 ‘유심’을 단순히 불교교양지 아닌 종합잡지 만들 생각 추정
“계동 43번지 만해 한용운 옛집은 지금 아무런 문화재도 아니다”


만해 한용운은 1918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했다. 서울 종로구 계동 43번지에 ‘유심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는 최남선이 운영하는 신문관에서 했다. 1918년 10월에 2호, 12월에 3호까지 발간했다. 이미 ‘정선강의 채근담’과 ‘불교대전’ 등을 발간하면서 출판·언론 사업에 눈을 뜬 만해 한용운이 불교 교양잡지에 도전한 것이다. 한용운이 창간한 불교 교양잡지 ‘유심’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청년들의 교양 증진을 위한 잡지였다. ‘유심’은 국판 60여 페이지의 불교교양지를 표방했다. ‘유심’ 창간호는 1918년 9월에 발간하고, 제2호는 그해 10월, 제3호는 12월에 잇달아 발행된다. 하지만 ‘유심’은 일본총독부의 탄압과 3·1독립만세운동의 준비 등으로 인해 제3호로 중단됐다. 그렇다면 만해 한용운은 왜 잡지 ‘유심’을 발간했을까.

이는 ‘유심’의 창간사에 해당하는 ‘처음에 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배를 띠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 바람이 굳셈이랴. 서리 아래 푸르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 대(竹) 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나니라.…<중략>…가자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

여기서 만해 한용운이 ‘유심’을 통해 대중들의 의식을 계몽시키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매화’는 만해가 그리는 꿈이고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유심’에 수록된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만해가 썼지만 박한영, 백용성, 권상로, 이능화, 김남전, 최남선, 최린, 현상윤 등도 주요 필자로 참여했다. 실제 박한영은 ‘타고르의 시관’을 만해 한용운은 타고르의 ‘생의 실현’을 번역하기도 했다.


■ 만해, ‘유심’의 근간 ‘민족운동’이 화두
3·1독립운동의 가장 선봉에 섰던 최린은 ‘유심’ 창간호에 ‘시아수양관(是我修養觀)’이라는 제하의 글을 썼다. 육당 최남선은 ‘동정(同情)바늘 필요(必要)잇는 자 되지 말라’ 등 청년의 수양과 나아갈 지표를 제시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만해 역시 △조선 청년 수양 △고통과 쾌락 △청년의 수양 문제 △가정 교육이 교육의근원이다 △과학의 연원 △자아를 해탈하라 △항공기 발달 소사 등의 글을 쓰기도 했다. 모두 시대정신이 적절히 나타난 글들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은 ‘유심’을 단순히 불교교양지가 아닌 종합잡지로 만들 생각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유심’에는 특이하게 ‘문예공모’ 코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심’ 제3호에는 ‘당선 문예란’을 통해 그동안 응모한 결과를 발표하고 시상했다. ‘유심’은 매호에 걸쳐 보통문, 단편소설, 신체시, 한시 등 4개 분야의 문예 작품을 현상 모집해왔다. 만해는 당시 학생소설 ‘고학생’을 쓴 종로 견지동 118번지의 방정환, 평양 창전리의 김순석을 수상자로 선발했다. 방정환에게는 1원 50전의 상금이, 김순석에게는 50전의 상금이 돌아갔다. 선외 가작 당선자로는 김형원, 박중빈, 철아, 소파생, 이형준, 이영재, 어효선, 김창진, 이중각 등이 선정됐다. 이들은 모두 훗날 한국 사회와 문단에서 높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로 성장한다. 이들의 성장 계기를 만해 한용운이 발간한 ‘유심’이 만들었다는 것은 문단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해 한용운도 ‘유심’을 자유시를 실험하는 장으로도 활용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심(心)’이라는 작품인데 ‘심(心)은 심이다’로 시작해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로 끝나는 이 시는 ‘님의 침묵’ 이전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되며 만해 한용운의 작품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유심’은 3·1독립운동의 밑거름이기도 했다. 3·1운동 핵심 인사인 최린,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현상윤 등을 필자와 동지로서 인연을 맺게 한 역할을 ‘유심’이 톡톡히 했다. 또한 당시 언론에 반드시 등장하던 총독부 관리의 글을 배제해 민족 주체성을 확고히 보여준 것만을 봐도 ‘유심’의 근간에는 ‘민족운동’이라는 화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은 “만해 스님이 ‘유심’을 민족사상지이자 3·1운동 전위지로 발전시키려 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유심’의 종간 배경이 3·1운동과 직결돼 있었다는 점을 직시할 때, 민족의 정신문화를 선도한 사상지로서의 위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해 스님은 ‘유심’의 언론활동을 통해 세계정세의 흐름과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3·1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 만해, 불교계의 ‘독립선언서’배포한 곳

불교 교양지 ‘유심’창간호.
불교 교양지 ‘유심’창간호.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교섭을 마무리 지은 최린은 만해 한용운을 찾아가 불교계의 민족대표 참여를 내락 받았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뤄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불교계의 대표로서 한용운은 해인사 승려 백용성만 민족대표로 참여시킬 수 있었다. 유림에 대한 포섭도 한용운의 몫이었다. 거창으로 내려가 영남유림의 대표격인 면우 곽종석을 만나 승낙을 얻었다. 그러나 곽종석은 3월 1일 직전 급환이 생겨 아들 편에 인장을 주어 만해를 찾아가도록 했으나 3·1운동 전야의 민감했던 상황 속에서 만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곽종석은 민족대표로 서명하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이를 분통하게 여겨 뒷날 파리장서(1919년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를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불교계의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을 맡은 만해는 2월 28일, 선언서 3000매를 인수해 그날 밤 자신의 거처로 중앙학림(현 동국대학교) 학생 10여 명을 불러 독립운동에 대한 소신을 알리고 학생들이 담당할 역할을 알려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종로구 계동43번지(새주소 계동길 92-3)는 ‘유심사’의 내력 알림판과 함께 ‘유심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계동 43번지 만해 한용운 옛집은 지금 아무런 문화재도 아니다. 실제 ‘유심사’는 불교계 3·1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2월 28일 밤 만해 스님은 거처 유심사로 학생들을 급히 불러모아 독립선언서의 작성경위와 3·1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의 배포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만해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회’라는 모임을 운영하던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정부나 서울시 등에서 매입해서 만해 한용운을 기념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해야할 것이라는 제언이다. 현재 3·1독립운동의 현장이 대부분 사라진 현실에서 이 조그마한 옛집이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불교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모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심사’이지만 제대로 된 표지판이 붙게 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실제 지난 2012년까지 ‘유심사’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종로 계동 43번지가 아닌 58번지 우물터에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특히 만해 한용운이 계동 43번지에 거처할 때 쓴 에세이‘전가의 오동(前家의 梧桐)’을 통해 1919년 당시에는 한용운 옛집 앞집에 오동나무가 있었다. “나의 우거(寓居)는 계동 막바지의 여두소옥(如斗小屋)이라, 지면이나 건물로 말하면 심히 협소하여 매우 갑갑할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몹시 갑갑하지 아니한 이유는 지형이 초고(稍高)하여 비교적 일광을 많이 받고, 공기가 청신하여 청풍이 시래(時來)하며, 주위에 수목이 있어서 그 양음적취(凉陰積翠)가 족히 고염(苦炎)의 번민을 소각(銷却)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협착(狹窄)한 소옥에서 성하(盛夏)를 지냈으되 그다지 염열(炎熱)의 고를 감각치 못하였도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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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영 2021-05-25 16:01:51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어제 저 앞을 지나며 유심사란 기사를 검색하다 이 글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