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선양사업, 지자체협력 독립정신의 길 함께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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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선양사업, 지자체협력 독립정신의 길 함께 찾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10.0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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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25>
강원도 인제에서는 올해까지 23회째 만해축전을 열고 세계적인 석학을 대상으로 만해대상을 시상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한용운 탄생 140주년이자 열반한지 75주년의 해
만해 한용운 선양사업 추진, 관련 자치단체들 상호협력 필요의견 대두돼
전국에 흩어진 만해 관련 콘텐츠, 관련 지자체와 공유·체계화 사업 추진
역사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선양사업은 지방자치시대 국가·자치단체의 몫


근대 한국사에서 3·1독립운동은 가장 위대한 역사적 사건의 하나다. 3·1독립운동은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제1차 대전 후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재편성을 시도하던 때에 세계사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으려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일제는 강점 후 기만적인 선전을 일삼았다. 한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하지 않는 ‘열등민족’이라느니, 일제의 ‘개혁정치’에 열복(悅服)하고 있다느니 등의 기만적인 식민통치를 호도하려는 선전활동을 계속했다. 3·1독립운동은 일제의 이 같은 기만적인 선전의 허구성과 거짓된 ‘개혁정치’의 실상을 폭로했다. 아울러 일제가 행한 통치는 한민족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무단통치였다. 한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수탈통치였으며, 한민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괴하려는 민족말살통치였다. 이 거족적인 몸부림은 한민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자유와 평등, 평화와 공존에 바탕한 완전자주독립 이었다. 일제가 3·1독립운동 이후에 형식적으로나마 무단통치를 폐지하고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된 것은 이 운동으로 강점통치 자체에 심대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것도 종래의 식민통치를 더 교활하게 비튼 것이었다.

3·1독립운동은 근대 한국민족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3·1독립운동은 한말 이래 여러 갈래로 산만하게 흩여졌던 민족주의 흐름을 하나의 물줄기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 민족주의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로 새롭게 부각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건립으로 구현된 민주공화정운동이다. 3·1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정의 토대 위에 대한민국을 건립토록 했다. 이는 3·1독립운동이 ‘3·1독립혁명’으로 불려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의 강압에 비폭력으로 맞선 3·1독립운동의 정신은 ‘기미독립선언서’의 말미에 나오는 ‘공약삼장(公約三章)’으로 압축된다.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공약삼장’은 비교적 우회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비해 민족의 자주 독립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함축한 행동강령이었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독립선언서’보다 ‘공약삼장’을 트집 잡아 민족 대표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해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 만해와 관련된 전국을 순례하는 프로그램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의 해이며, 공교롭게도 홍성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며 승려인 만해 한용운 선사의 탄생 140주년이자 열반한지 7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계기로 만해 한용운의 삶과 사상의 깊이를 찾아보기 위해 대략 2000㎞(5000리)의 긴 여정을 따라 만해의 정신과 삶, 그의 흔적이 배인 주요한 곳들에 대한 취재를 정리하고자 한다. 지난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만해 한용운의 출생지인 홍성군과 서울 성북구, 강원도 인제군, 속초시 등이 함께 만해 관련 유적지 순례 행사를 전국 최초로 개최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만해의 출생지(충남 홍성 일원), 출가·수행지(강원도 인제군·속초시·고성군, 부산, 경남 양산, 사천), 독립운동·입적(서울 종로구·성북구·서대문구·중구·중랑구)과 만해기념관이 있는 곳(경기도 광주) 등 만해와 관련된 전국의 장소들을 순례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해 한용운 선양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만해와 관련이 있는 자치단체들 간 상호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는 이유다.

만해 한용운은 근대사의 붕괴기에 태어나 현대사의 이른 새벽인 1944년 6월 29일까지의 일평생을 민족 독립운동에 바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난 만해는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청년이 돼 가담한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의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 이후 1905년에는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스승 연곡(連谷)의 밑으로 들어가 출가해 정식으로 승려가 됐고, 같은 해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일제에 박탈당하자 국가의 독립을 위한 자강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가 세력을 넓혀가는 것을 지켜보며 당시 세계에 대해 눈을 뜬 한용운은 황해도 원산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며 견문을 넓히려는 시도를 했지만 불안정한 시국에 다시 귀국했다. 이후 190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물을 공부한 뒤 귀국했다. 만해의 민족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이즈음부터라고 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만해는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해 서울 청진동에 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해 측량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높이려 했다. 1910년에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만해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민족혼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전력을 다했고 연해주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까지 만해는 민중의 의식개혁과 불교개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 같은 해 만해는 일본이 주장하는 한일불교동맹을 반대·철폐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의 독립지사들을 만나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협의하기도 했다. 3·1독립운동의 전위지로 평가받는 ‘유심’도 이때 창간됐다. 당시 유심지는 단순한 종교지를 탈피해 민족의 전통문화지, 사상지,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3·1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만해 한용운의 삶과 사상에는 그의 역사관과 세계관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만해의 삶과 사상의 흔적, 깊이 찾아보기
따라서 홍성군 만해생가지를 시작으로 인제군 하늘내린센터, 만해마을, 백담사, 속초시 신흥사, 광주시 만해기념관,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형무소, 성북구 심우장, 동국대 등을 연결하는 순례코스(800㎞, 2000리 추정)나 경남 양산과 부산,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까지도 포함하는(전체적으로 대략 2000㎞, 5000리 추정)길을 연결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만해 한용운 관련 콘텐츠를 관련 지자체와 공유하고 체계화하는 사업에 대한 지속적 추진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청소년들의 빈약한 역사의식을 고취하자는 물결이 일고 있다. 학교나 관련 단체에서 역사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청소년들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무관심은 정규 교육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한국사의 처지와 맥을 같이한다. 초·중·고교 교육과정에서 한국사는 국·영·수 등 주요 과목에 치여 달달 외워야 하는 암기 과목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교육은 실리만을 추구하는 시각으로 판단돼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는 바로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겨있고, 우리 선조들의 피와 노력이 일구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 독립운동가의 목숨을 건 행보가 민족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어떤 나라도 자기 나라의 역사교육을 소홀히 하면서 사회발전이나 성장을 이끌어낸 나라가 없다. 지역 문화와 역사를 연계한 청소년교육이야말로 지역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우리 역사를 외면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한국사의 근간 자체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의 해이며, 만해 한용운 선사의 탄생 140주년이자 열반 75주년을 맞았다. 이를 계기로 만해 한용운의 삶과 사상의 깊이를 찾아보기 위해 대략 2000㎞(5000리) 길을 따라 만해 한용운의 정신과 그의 흔적이 배인 주요한 곳에 대해 취재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취재에 따른 시간이 충분치도 않았고, 분량에 비해 지면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튼 만해 한용운 선양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만해와 관련이 있는 자치단체들 간 상호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은 인식했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태어난 곳이 홍성지역이기 때문에 역사문화예술 인물 중에서 오랜 역사 속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많은 역할을 했던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 내지 선양을 위한 일은 지방자치시대 국가와 자치단체의 몫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지금껏 손을 놓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부터라도 체계적인 선양사업을 실시해 남겨진 문화유산이나 족적 등을 알아보는 순례행사 등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이를 통해 충남도청소재지 홍성의 명성을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선양사업을 공유하면서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 등 교류협력의 가능성 등을 진단하고 만해 한용운의 사상과 흔적을 계승할 당위성이 요구되고 있다. <끝>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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