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세상을 떠난 곳 서울 성북동의 북향집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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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세상을 떠난 곳 서울 성북동의 북향집 ‘심우장’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0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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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4>
성북동 북정마을의 심우장 앞길 님의 침묵 사비 옆의 한용운 좌상.

가난과 일제의 압박에도 바느질 하면서 만해 뒷바라지한 부인 유씨
서울시 기록물이던 심우장,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0호로 승격돼
남향으로 지으면 조선총독부 바라보이기에 심우장 북향으로 주춧돌
서대문형무소서 옥사한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5일장 심우장서 지내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만해 선사의 75주기를 기리는 추모다례가 기일인 지난달 29일 봉행됐다. 재단법인 선학원(이사장 법진)과 정법사, 성북문화원(원장 조태권)은 만해 선사의 기일인 6월 29일 오전 11시 심우장에서 추모다례를 봉행했다. 이번 행사는 국가보훈처와 성북구, 만해 한용운선양사업지방정부행정협의회가 후원했다. 이번 추모다례는 심우장이 지난 4월 8일 사적 제550호로 지정된 이후 처음 맞는 추모행사여서 그 의미를 더했다.

이날 추모행사에는 재단법인 선학원 법진 이사장, 만해 선사의 딸인 한영숙 여사와 유가족, 유승희 국회의원, 이승로 성북구청장, 조태권 성북문화원 원장, 유환동 홍성문화원장 등 사부대중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날 선학원 이사장인 법진 스님은 추모법어에서 한영숙 여사와 나눈 이야기를 토대로 만해 선사와 가족들의 노고에 깊이 감동했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법진 스님은 “저희 재단에서는 매년 국가보훈처의 후원 아래 만해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금년 학술제에서는 ‘만해와 독립운동’을 주제로 선학원에 10여 년간 주석하시며 벌인 독립운동을 역사적으로 증명해 발표했다”고 말하고, 이어 “내년에는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심우장에서 주석할 당시 활동을 학술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법진 스님은 또 “가난과 일제 압박에서도 바느질을 하면서 만해 스님을 뒷바라지하던 유씨 부인과 일제 형사의 감시에서 하루하루 고통에 살았던 가족의 희생”에 감사를 전하고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인데 내가 어떻게 불을 때고 살 수 있겠냐던 만해 스님의 자존심이 서린 심우장은 우리 민족의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곳”이라고 평가했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추모사에서 “얼마 전까지는 서울시 기록물이었던 심우장이 많은 분들의 관심으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0호로 승격돼 만해 스님에 대한 예를 지키는 것 같아 다행”이라며 “국가지정문화재가 된 만큼 성북구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관리할 테니 국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열악한 부분을 해결해주면 좋겠다”고 밝혔다.

성북구가 지역구인 유승희(더불어민주당·성북갑) 국회의원도 추모사에서 “사적 지정으로 국민적 차원에서 심우장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면서 “다례제를 주관하는 선학원과 성북문화원 측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또 “만해 선사께서는 불교의 정신을 가지고 민족 독립의 중요한 역할을 해서 우리나라 불교의 격조를 새롭게 한 인물”이라며 “불교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이 귀중히 여기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태권 성북문화원장은 추모사에서 “만해 스님이 무력으로 3·1운동을 진압하는 만행을 보며 일제가 머지않아 반드시 망할 거라 예측하셨다”며 “당시 심우장은 다가올 독립을 기다리고 준비하던 희망과 실천의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북 분단, 국민 분열로 어지러운 이때 만해 스님의 말씀과 실천을 기억해야 한다”며 “심우장에서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며 동지들과 실천의 길을 모색하던 스님을 본받아 통합의 길에 동참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이 세상을 떠난곳인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

■ 만해 55세에 마련한 집, 성북동 심우장
만해 한용운은 1933년, 55세에 이르러서야 서울 성북동에 집 한 칸을 마련한다. 마음 놓고 기거할 방 하나 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마련해 준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이던 방응모의 주도로 집을 마련하려하자 벽산 스님이 자신의 토굴로 사용하려 했던 땅 54평을 내놓았고, 거기에 60평을 보태 집을 짓게 됐다고 한다. 중등학교 수학교사였던 최규동이 설계를 맡아 5칸의 한옥을 설계했다. 집을 지을 때에는 박광, 김관호 등이 많은 일을 거들었다고 전한다. 특히 심우장 건축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심우장은 한국 전통 가옥이 선택하는 남향이 아닌 북향을 하고 있다. 이유는 만해가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수탈하고 있는 일제의 총독부를 마주할 수 없어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북향을 선택한 이유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지은 것이 ‘심우장(尋牛莊)’이다. 만해가 손수 지은 택호(宅號)는 불교의 깨달음의 과정을 도상화한 ‘심우도’에서 기인한다. ‘심우도’에서 소는 마음에 비유된다. 마음자리를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자의 삶을 기저에 두고 있는 만해의 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만해는 심우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수행하는 도량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잡지 ‘삼천리’ 1936년 6월호에 게재된 ‘심우장에서 참선하는 한용운 씨를 찾아’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만해는 ‘불당 같은 곳에서 칩거하면 답답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틈만 있으면 정좌하고 속념에서 물러나 참선하는 것이 매일의 중요한 일과”라고 답변하고 있다. 이어 “조용하고 틈이 있으면 언제든지 몇 십 분이고 몇 시간이고 참선을 하게 된다”면서 “아침 일찍 세수한 다음 저녁밥이 지난 뒤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에는 매일같이 참선을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심우장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여러 역사적 사건들도 있었다. ‘흑풍’이나 ‘박명’, ‘후회’ 등의 신문 연재소설과 적지 않은 글들이 심우장에서 집필됐다. 또한 당시 금서로 묶여 있던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다가 사전에 발각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일화 중 하나가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의 5일장을 심우장에서 지내게 된 일이다. 김동삼은 국권 강탈 후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인물로 1931년 일제에게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1937년 옥사했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동삼의 갑작스런 죽음에 만해는 며칠 동안 통곡을 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연고자는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붙였는데도 조선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만해는 직접 서대문형무소로 찾아가 시신을 심우장으로 모셔와 5일장을 지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효당 최범술은 “일송의 영구를 자기 자택 안방에 옮겨 모신 뒤 5일장을 치를 무렵에 이 소식을 들은 국내 유지들은 모두들 심우장에 운집했던 것이다. 그때 참석한 인사를 몇 사람 꼽을 것 같으면 정인보, 홍벽초, 김병로, 이인 씨 등 무려 수백 명 이었다 한다. 만해 선생은 일송 영구를 껴안고 방성통곡하였는데, 평생 만해 선생이 눈물을 흘린다거나 또는 호곡한다는, 만해 선생을 아는 사람은 처음이었을 것이며, 또한 단 한 번이었을 것이라고들 말한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만해는 일제 말기 혹독한 통치하에서도 일제의 황민화운동을 전 조선인에게 강요할 때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 학도병 출병 반대운동을 했으며, 한편으로는 경전 번역에도 힘써 ‘유마경’을 출간하기도 했다.

만해는 1933년 심우장에서 말년 생활을 시작해 11년 뒤인 1944년 6월 29일 66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일제가 주는 배급을 거부해 영양실조까지 얻어 열반에 들었기에 마지막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만해의 다비는 자신이 김동삼을 영결했던 미아리의 조그만 화장터에서 거행됐다. 그마저도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은 유골은 수습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조종현의 기록에 따르면 유해는 모두 소골(燒骨)이 됐으나 오직 치아만이 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남은 치아도 역시 항아리에 담겨져 유골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만해는 근현대를 통해 수행자이면서 민족의 독립운동가였고, 시대를 선도했던 사상가였으며, 깨달음의 열망과 자유의 의지를 노래한 시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의 궤적은 열반 75주기를 맞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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