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불교대전’ 간행한 범어사, 부산 첫 3·1만세 주도
상태바
만해 ‘불교대전’ 간행한 범어사, 부산 첫 3·1만세 주도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11 09: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만해 열반 75주년 기획<19>
만해가 불교대전을 간행한 부산 범어사.

범어사, 신라가 통일을 이룬 668년보다 10년 늦은 678년 창건해
만해 한용운과 인연,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란 뜻의 선찰대본산
만해, 1914년 범어사서 ‘불교대전’ 간행, 대중불교 실현 위한 초석
부산 최초 독립만세운동, 3월 7일 범어사 스님들을 주축으로 시작


신라가 통일을 하고 대내외적인 안정을 찾아 갈 무렵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고 한다. 이에 왕은 의상대사와 함께 금정산에서 7일 밤낮으로 불사를 올렸고, 마침내 ‘칼이 비처럼 내렸고 흙과 돌이 비처럼 흩뿌려 왜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의상대사로 하여금 절을 짓도록 한 것이 바로 부산 범어사이다. 문무대왕은 동해바다에 수중릉에서 신라를 지켰고 의상대사는 바다와 인접한 산인 금정산에 범어사를 개창해 조국을 지킨 것이다. 범어사는 신라가 통일을 이룬 668년보다 10년 늦은 678년에 창건됐다. 이후 835년 흥덕왕 때 개창됐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가 범어사를 본거지로 왜적에 맞섰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 때는 범어사 명정학교(현 금정중학교)에서 배출한 학도들이 동래지역 만세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3·1독립만세운동 민족지사 33인 중 불교계 인사인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1864~1940)도 범어사와 인연이 깊다. 부산 범어사는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란 뜻의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다. 범어사 일주문에는 이 편액이 걸려 있다. 이처럼 범어사는 인물들의 발자취만으로도 역사가 되는 호국 사찰이기도 하다.

■ 만해 한용운 범어사에서 불교대전 간행
‘불교대전(佛敎大典; 1914)’은 한용운 불교사상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불교대전’을 독해하는 하나의 쟁점으로 ‘조선불교유신론’과 얼마나 유기적 관련성을 지니는지, 일반적 경전과는 달리 근대불교라는 시대적의 산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불교대전’의 집필 배경으로써 ‘조선불교유신론’과의 상관성과 ‘불교대전’ 편찬에서 드러난 근대 인식에 대한 검토는 한용운 사상을 심도 있게 파악할 수 있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한용운이 백담사에서 정식으로 출가한 해인 1905년(27세), 일본에서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일본 정토진종 동본원사파의 난조분유(南條文雄, 1849~1927)의 주도하에 마에다 에운(前田慧雲)과 함께 편찬한 ‘불교성전(佛敎聖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일본 사회에 급속히 보급되고 있었다. 1908년 약 6개월간 일본을 돌아볼 기회를 가진 만해 한용운은 이때 ‘불교성전’을 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짧은 기간이지만 일본의 개화된 실상을 직접 목격한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으로 개혁의 의지를 다지고, ‘불교성전(1905)’에 자극 받아 ‘불교대전’의 편찬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구성 체계의 독창성이나 풍부한 경전의 인용 등을 감안해 본다면 ‘불교대전’은 ‘불교성전’을 능가하는 한용운의 독특한 사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총 9품으로 구성된 ‘불교대전’의 제6 자치품이나 제7 대치품에는 다분히 유교적 세계관과 서구 근대사상의 요소들이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만해가 역점을 두고, 공을 들인 이 두 품은 양적으로도 그 중요도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자치품과 대치품의 세밀한 분석은 한용운 사상의 특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나아가 ‘불교대전’의 전체적인 체계나 구성 방식은 한용운이 지향하고, 구상한 바가 무엇인지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지침이라 할 수 있다.

‘불교대전’ 역시 시대의 산물이므로, 어떠한 상황과 시대정신이 만해로 하여금 이같은 작업을 착수하게 했는지 그 배경을 탐색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지식인이 전통과 근대를 어떻게 극복하고 수용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로 꼽힌다. 또 한용운의 사상이 한국의 불교사상 뿐만 아니라 한국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의를 살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용운은 백담사로 출가하고도 당시 세계정세와 나라 안팎의 격변하는 시대 흐름에 민감해, 산중에서 조용히 수행에만 정진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 일본, 만주 등 바깥세상으로 탐방하는 외유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교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며, 시중(市中)의 문제들을 풀어나가고자 했다. 그래서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은 바로 만해가 직면한 시대상황을 불교적 방식으로 모색한 근대 불교의 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불교대전’은 만해의 교상판석서(敎相判釋書)이자 ‘조선불교유신론’의 개혁적 이상이 집약된 사상서로서 만해 사상의 다양한 지형을 이해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통과 의례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이 승가의 개혁론이었다면, ‘불교대전’은 재가신도를 위한 불교교리와 불교사상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불교대전’의 편찬을 계획한 한용운은 1912년부터 경남 양산 통도사에 비치된 방대한 양의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하기 시작해, 2년 후인 1914년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간행했다. ‘불교대전’은 만해 한용운의 신념인 ‘대중불교’의 실현을 위한 초석을 놓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즉 고려대장경과 범어, 팔리어 경전 등 400여 개가 넘는 경전에서 총 1741(1742)개에 달하는 인용구를 가려 뽑아 만든 것으로 한국불교의 기념비적인 일로써 불교의 골수를 일반 대중에게 전하고자 한 한용운의 대승적 보살정신에서 연유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한 만해 한용운의 친필 원고.

■ 범어사 부산 첫 3·1독립만세운동 주도
실제 한용운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김법린은 3·1만세운동 참가, 중국에서 항일투쟁, 프랑스 유학 시절의 활동, 귀국 후 독립운동 등을 이어 온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불교계 인사들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숨결이 꾸준히 등장한다. 김법린의 평전 ‘불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불교인 김법린(역사공간 발행)’ 등에 따르면, 한용운과 처음 만난 때는 그가 1918년 불교계 최초 고등교육기관인 중앙학림에 입학하면서다. 당시 민중 의식계몽운동을 펼치던 한용운은 중앙학림에 출강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28일 밤에는 한용운이 집(서울 유심사)으로 학생들을 불러 자신이 작성, 기초위원으로 참석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서울과 각지에 배포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당부를 받은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올리던 순간, 시내에서 선언문을 뿌렸다. 시내 배포를 마친 김법린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 범어사로 향했다. 일제의 검문을 피하기 위해 부산역 대신 물금역을 택해 금정산 고당재를 넘어 우여곡절 끝에 범어사에 도착했다. 학교 등 교육기관과 포교당, 야학 등을 운영하던 범어사는 거사를 모의하기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이로써 서울에서 온 학생들과 범어사 스님들은 3월 7일 동래장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30명의 결사대도 조직했다. 준비 과정에서 일부 주동자가 체포되기도 했지만 만세운동을 향한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이윽고 3월 6일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마치고, 지방학림 승려들과 명정학교(현 금정중학교) 학생들은 군중과 함께 3월 7일, 동래읍 서문 부근에서 동래시장까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했다. 사전에 등사된 독립선언서 5000여 장과 대형 태극기 1개, 작은 태극기 1000여 개가 거리에 흩날렸다. 이후 일제 총독부는 만세운동을 일으켰다는 이유 등으로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을 폐교하는 보복을 행한다. 하지만 범어사는 1926년 3월15일,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함으로써 민족교육을 계승하고자 했으나 1943년 책임자 김법린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폐원되는 고난을 겪는다. 해방 이후 1946년 3월15일, 현재의 금정중학교가 창설되면서 명정학교와 지방학림의 맥을 잇게 된다.

이렇게 부산 최초 독립만세운동은 범어사 스님들을 주축으로 시작됐으며, 범어사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계승한 중심지가 됐던 것이다. 민족문화적 측면에서 일제의 강제 침탈로 나타났던 불교의 왜색화를 막아내고 민족 고유의 불교를 지켜낸 불교 자주화운동이 범어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순천 송광사에서 시작된 임제종은 부산 범어사로 종무원을 옮긴 뒤 동래·초량·대구·서울 등지에 포교당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 불교의 침투에 맞서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던 민족수호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