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읍성 밖 제의 공간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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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 밖 제의 공간 재조명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5.11.13 06:49
  • 호수 916호 (2025년 11월 13일)
  • 3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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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여제단·성황단 등 전통 제례공간 체계 확인
백월산 아래 역사공간, 지적·문헌 통해 실체 드러나

홍주목 행정과 의례의 중심은 객사와 동헌이었다. 객사는 지방 수령이 국왕에 대한 의례를 행하고 중앙 사신을 접대하는 공간이었고, 동헌은 홍주목사가 행정을 집행하던 곳이었다. 

즉 ‘홍주목’ 내부가 국가 질서와 행정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면, 향청·작청·교방청 등은 이를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홍주의 공간 구조는 읍성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읍성을 벗어난 외곽에는 공동체의 정신적·의례적 기초를 이루는 제의 공간이 분포하고 있었다. 홍주읍성 북쪽에 자리한 홍주향교를 비롯해 사직단, 여제단, 성황단 등이 그것이다. 

사직단은 전국적으로 토지와 곡식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를 올리는 국가 제례 공간으로 설치됐으며, 홍주에도 분명히 사직단이 존재했다.

홍주사직단과 관련된 사료는 1914년 조선총독부 관방에서 각 지방 장관에게 내린 행정통첩에서도 확인된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사직단 부지를 무분별하게 훼손하지 않고, 문화·경관적 가치가 있는 지역으로 보호하려 한 조치였다. 이 조치로 홍주사직단 역시 일정 부분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사직단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1744년 《홍주읍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해당 읍지에서는 ‘사직단은 백월산 아래에 있다’고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어 1895년 발행 《충청읍지》와 1906~1910년 발행 《충청읍지》 속 홍주지도에도 ‘홍주사직단’의 표기가 나타난다. 이는 사직단이 홍주읍성 서문과 가깝되 성 내외 경계지점에 위치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총독부 ‘부지매각 자료’(대정 11년·1922년)에는 ‘홍성사직단 부지를 매각한다’는 기록과 함께 ‘자연상태로 보존할 것’이라는 지시가 병기되어 있다. 이는 사직단 터가 일제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지 않고 일정한 경계와 의미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매각기록에는 ‘홍성군 홍성면’으로 적혀 있으나 위치도에는 ‘홍성군 홍주면 월산리 51번지’로 표기되어 있어, 이는 지명의 변동 과정에서 나타난 오기로 추정된다. 

행정구역은 1914년 ‘홍주군’과 ‘결성군’이 통합되며 지금의 ‘홍성군’으로 바뀌었고, 홍주면은 1941년 10월 1일 ‘홍성읍’으로 승격됐다. 지번 변화와 행정구역 개편을 고려할 때, 사직단 위치는 현 ‘홍성읍 월산리 529-6’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 홍주요양병원(529-5) 아래 지형과 일치한다.

사직(社稷)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백성의 생업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여제단은 전염병 등으로 희생된 원혼을 달래던 제단이었으며, 성황단은 마을의 수호와 공동체 결속을 상징했다. 이 세 공간은 천년 넘게 홍주 공동체의 정신 구조를 이루어 온 핵심 의례 체계였다.

광복 이후 80여 년 동안 문헌 속에서만 전해지던 이 제의 공간들의 위치가 고지도, 지적 기록, 매각문서 등 실증 자료를 통해 다시 드러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유적의 존재를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일제강점기 속에서 훼손되었거나 잊혀진 지역의 정신과 역사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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