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과 부보상, 그리고 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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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과 부보상, 그리고 홍주의병의 역사적 평가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2.10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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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4>
▲ 홍주의병과 동학군·천주교 신자들이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홍주의사총 전경

1895년 11월 부보상들 수십 명 선비들과 합류 홍주성에 들어와
3일천하 홍주성전투 서산·남양·대흥군수 수백 명과 홍주 향해
홍주의병, 소작농민도 참여·동학교도 참여 사실 확인 어려워
전기의병 이념 국수보복론·존화양이론·개화망국론·대일결전론

 

홍주의병의 병사층을 이룬 다른 집단으로 부보상이 있다. ‘의암유선생서행대략’에 “이조승이 장소(將所)의 영으로 부보상을 거느리고 청풍으로 갔다”고 한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이 서신 연락의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부보상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 초기 단계인 1895년 11월 28일에 부보상들이 수십 명의 선비들과 합류하여 홍주성에 들어왔으며, 이세영이 부상들과 함께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를 도운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다음으로 전기의병에는 관군 또는 해산된 지방병도 참여했다. 상원의병의 주요 구성원이 1895년 해산된 지방병들이었다. 제천의병에도 이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참여했음이 기록되고 있다. 이들은 실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의병세력의 지원 요청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초기단계에는 관군이 참여했다. 비록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홍주성전투에 서산·남양·대흥군수가 수백 명씩을 거느리고 홍주로 향하기까지 했다. 청양군수 정인희의 경우는 청양군 내의 관군을 직접 이끌고 의병에 참여했으며, 이승우의 변심 후 의병 지도층이 체포된 후에도 공주부 경무관 구완희가 이끄는 관군과 전투행위까지 했다. 유성의병의 병사 층 역시 주로 문석봉의 휘하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구 군인들이 중심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에는 소작농민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피 현령 오영석이 집안 일꾼 100명과 군자금 1만 냥을 준비,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이밖에 안창식(安昌植)·채광묵(蔡光默)이 모집한 180명의 민병에는 다수의 소작농민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의병의 참여 층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

홍주의병과 유성의병에도 동학교도의 참여 사실을 확인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이는 홍주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김복한·이설·안병찬·이세영 등은 바로 유회군을 편성하여 홍주성전투를 감행했던 주역들이었기 때문이다. 김홍제 역시 남포에서 유회군을 편성해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워 정3품에 추증됐으며, 무과출신인 황재현(黃載顯) 역시 보령에서 유회군을 편성해 동학군을 진압했다. 이와 같이 반 동학의 기치 아래 뜻과 행동을 같이했던 이들이 홍주의병에 동참했던  것이다. 문석봉 역시 진잠·금산·논산·보은·청산 등지에서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에 의해 선정비까지 세워진 인물이다. 유성의병 역시 이때 문석봉의 휘하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동학교도의 참여는 사실상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전기의병의 거의이념은 첫째 국수보복론에서 찾을 수 있다. 유생들은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이 시해사건을 ‘천고에 없는 강상의 대변’이라고 통분했다. 따라서 이들은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는 일국수보복과 적을 물리쳐 복수하는 일은 강상을 회복하는 일이 춘추의 대의라고 여겼다. 유생들의 이러한 국수보복론은 ‘주욕신사’의 충군애국사상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유인석이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하가 죽음은 옛 사람의 올바른 가르침’이라 했다. 임금이 욕을 당함이 일찍이 오늘날보다 심함이 없으니 오늘날 이른바 신하가 되어 죽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말로 천하 만세의 입을 막을 것인가.
둘째, 전기의병의 거의 이념은 존화양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존화양이론이란 위정척사론의 핵심이론으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화’라는 것은 주자학 중심의 중화소중화문화를 의미한다. 1894~1896년간에 전개된 갑오·을미의병의 기본이념이 존화양이론에 있었으며, 이는 나아가 개화정권에서 추진한 갑오경장의 반대논리로 작용했다 할 수 있다. 존화양이론을 거의의 이념으로 내세운 의병장은 화서학파 유생들만은 아니었다. 1895~1896년간에 충청도 홍주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장 김복한과 이설 역시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긴 인물들이다. 김복한은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후손이며, 더욱이 이단을 배척하는데 보다 강력한 논리를 편 남당 한원진(韓元震)의 사숙문인이니, 김복한은 존화양이론은 확고했다고 할 수 있다. 김복한은 어려서부터 ‘주자강목’을 즐겨 읽었다고 전한다. 강목의 정신은 ‘존중화 양이적’이 중요 이념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김복한은 홍주의병을 일으키기 전인 1895년 12월 2일 홍주관찰사 이승우에게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면서 “당태종이 천하를 얻기 위하여 죄 없는 진양령(晋陽令)을 베어 종묘사직에 중화의 명맥을 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김복한의 화이정신에 대한 경도는 이설이 작성한 김복한 만사에서 “만년을 내린 화이전통이 그대 한 사람에 힘입어 지켜지도다”라고 한 대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김복한은 그의 사상을 펼치는데 화서 이항로의 존화양이론을 채택하고 아울러 이를 널리 보급하기까지 했다. 이 사실은 김복한의 말년에 해당하는 1921년에 편찬한 교재인 ‘주변록(主邊錄)’의 내용으로 확인된다. ‘주변록’은 이항로(4편), 김평묵(3), 유중교(3), 최익현(2), 유인석(1), 홍재구(1), 홍재학(1) 등의 글을 중심한 대표적인 척사 상소들이 있다. 김복한은 제자들에게 이 책을 교재로 강독했으니 간접적으로 화서학파의 학문을 전수한 셈이 됐다. 이와 같은 배타적인 자주성을 강조하는 김복한의 존화양이론은 말년까지 거의 변함없이 견지됐다. 비록 김복한이 1919년 3월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했다고 할지라도 김복한의 기본적인 서양배척론은 변함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설 역시 서세동점의 민족적 위기에 주자학을 철저히 신봉했으며, 천주교를 포함하는 이단을 사학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설은 도맥이 공자에서 주자로 이어졌다고 하면서 주자 이후로는 조선으로 도맥이 옮아와 조정암(趙靜庵)-이퇴계(李退溪)-이율곡(李栗谷)-송우암(宋尤庵)-한남당(韓南塘)으로 이어졌다고 계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남당 한원진이 말한 유석(儒釋)과 화이의 분별이 없어졌음을 통탄하였다. 또한 불교에 대하여는 ‘위정척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이를 비판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의 기조는 ‘위소중화(衛小中華), 척사학(斥邪學)’이라고 할 수 있다.

▲ 홍주성 전경

셋째, 전기의병의 거의 이념으로 반개화론 또는 개화망국론을 들 수 있다. 개화망국론이란 개화는 곧 일본에의 예속상태로 빠지게 되니 자주권을 상실하여 망국에 이른다는 논리이다.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 개화라는 말을 문명화 또는 변혁과 진보의 개념으로 파악했다. 반면에 척사유생들에게 ‘개화’라는 용어는 오히려 ‘왜국화’ 나아가 ‘망국’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홍주의병장 김복한을 비롯한 이설과 안창식도 개화망국론자라 할 수 있다. 김복한은 신학문에 대하여 “인심을 물에 빠뜨리고 세도를 괴패(壞敗)시킴이 심하고 어버이와 임금이 없고 어른과 아이의 순서가 없으며 3년 상을 모시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판했다. 김복한은 애국계몽운동에 대해서도 “애국을 부르짖는 자들은 국가만 알지 중화의 도를 알지 못하여 결국은 개화라는 구실 하에 서양화 한다”고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중국의 계몽사상가 양계초(梁啓超)가 공자를 비방했다 해 ‘머리를 자르고 배를 찢을 놈’이라고 혹평을 하고 있다. 이설은 “지금 개화를 빙자하여 우리나라를 삼키려고 획책하고 있다”고 개화파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안창식은 을미사변 전인 1895년 4월에 광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자 모병활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했던 인물이다. 안창식 역시 박영효 등 개화파에 의해 의관과 문물이 바뀜을 통탄하는 반개화이념에 경도돼 있었던 것이다.
넷째, 척왜론에 입각한 대일결전론 역시 전기의병의 주요 이념이라 할 수 있다. 척사의 대상이 일본에 집중되어 나타나면서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은 척왜론으로 변화됐으며, 이 척왜론은 1894~1895년 이후 대일결전론으로 강화됐으니 의병항전은 바로 대일결전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즉 전기의병은 일본을 침략세력으로 단정하고 이를 격퇴시키기 위한 일본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주장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대일결전론은 전기의병의 모든 의진에서 보여주는 기본 이념이라 할 것이다. 전기의병의 참여 층은 지휘부와 병사 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 출신의 양반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됐다. 그중에서도 화서학파·남당학파·노사학파·한주학파 등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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