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병 이근주, 망국의 슬픔·통분 이기지 못해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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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 이근주, 망국의 슬픔·통분 이기지 못해 자결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06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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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7>
▲ 청광자 이근주의 묘역(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진목정). 사진 원안은 이근주 열사의 초상화.

이근주, 아들 봉로·손자 인세 등 3대 홍주의병·독립운동 투신
을사늑약·경술국치 항거 자결 순국한 홍주출신은 이근주 유일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 8자, 가슴에는 유서가
열사의 자결, 순국은 민족적 각성의 촉구와 민족정신의 표상


 

홍주(洪州)출신의 이근주(李根周) 열사는 을미년 민비시해사건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김복한, 안병찬, 이설 등과 창의할 것을 모의하는 등 독립운동과 의병활동을 도모한 대표적 인물이다. 이근주의 아들인 봉로(李鳳魯) 또한 육군상무사 활동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마련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근주의 손자인 인세(李仁世)는 당시 대전공업대학을 다니던 중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징용돼 중국 남경에서 광복군에 가입하기 위해 징용을 탈출하여 광복군주둔지로 가던 중 병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3대가 홍주의병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근주는 1895년 을미사변 후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김복한, 이설, 송창식, 송병찬, 임한주 등과 주축이 되어 홍주(洪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했다. 이근주는 1910년(융희 4) 8월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망국의 슬픔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부친의 묘 앞에 주과(酒果)를 준비하여 고하고, 소나무에 기댄 채 목과 옆구리, 가슴 등을 찔러 자결, 순국한 인물이다.

1920년 12월에 간행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이 책의 저자인 박은식(1859~1925)은 자결한 사람들에 대해 “동복의 송완명, 태인의 김천술·김영세, 익산의 정동식, 선산의 허 모, 문의의 이 모, 충주의 박 모, 공주의 조장하, 연산의 이학순, 전의의 오강표, 태인의 김영상, 홍주(洪州)의 이근주(李根周) 등 28명이었다. 이외에 죽은 사람들도 전해지는 이야기는 있으나 그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대체로 이들은 목매어 죽기도 하고, 배를 갈라 죽기도 하였으며, 혹은 물에 몸을 던졌으며, 단식으로 굶어 죽기도 하였고, 혹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들은 다른 족속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몸을 더럽히지 않아 저절로 결백함을 빛낸 사람들이다. 그런즉, 살아서 대한사람, 죽어서도 대한의 귀신이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독립운동가나 의병들의 자결에 대한 내용과 방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해 기록하고 있다. 박은식 선생은 ‘의병정신이 곧 민족정신이요, 민족 혼’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 대한의사비(대한의사청광이공근주묘갈명).

■을사늑약·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우리민족은 일제의 무력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유교 지식인들은 충의정신에 기반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전(抗戰)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주의 경우만 보더라도 홍주성 함락과정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의병에 참가하지 못한 유학자들은 은거하거나 자결하는 방법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사람은 민영환(閔永煥), 송병선(宋秉璿), 황현(黃玹)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나, 충청도 내포지역에서는 홍주(洪州)출신의 이근주(李根周)가 유일하다. 이근주(李根周, 1860~1910)의 자는 문약(文若)이며 호는 청광(淸狂)이다.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고려조 태사(太師) 도(掉)가 시조가 된다. 조선시대 선조 때에는 한성부윤을 지낸 사관(士官)이 있으며, 아들 양간공(襄簡公) 서장(恕長)은 대사헌을 지냈다. 증손 문성(文誠)이 절도사를 지냈고, 아들 제신(濟臣)은 함경도 절도사를 지냈다. 또 다른 아들 중 명준(命俊, 1572~1630), 호 잠와(潛窩)는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충청도 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지냈는데, 이근주의 9대조가 된다. 이와 같이 명문사족이었던 이근주의 집안이 홍주(洪州)로 내려온 것은 6대 조인 만각(萬珏) 때로 당쟁이 심함을 보고 홍주의 구성동으로 내려와 세거하게 되었다.

이근주는 철종 11년(1860) 부친 현복(玄福)과 파평 윤 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명재 윤증의 5세손인 윤휘진(尹徽鎭)의 딸이다. 6세 때 홍주의 작현리로 돌아와 부친한테 수학하였으며, 공주의 마곡사 위에 있는 부용암, 덕선서(德山寺)와 결성의 고산사(高山寺) 등에서 독학하였다. 특히 맹자의 ‘웅어장(熊魚章)’을 좋아 했는데, 웅어장은 ‘맹자’의 ‘고자 상(告子 上)’에 있는 장으로 “맹자 가라사대,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다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다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라 하여 맹자가 ‘사생취의(捨生取義)’정신을 강조한 장이다. 여기서 이근주가 의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말수가 적고 부지런 했으며, 강직하고 과단성 있는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 이근주의 생가지(홍북면 중계리 386번지).

■이근주, 김복한 등과 홍주의병 일으켜
이근주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으로 고종의 머리가 깎인 사태에 통분하여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장서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 홍주목사인 관찰사 이승우를 만나 의병을 일으켜 적인 일본군을 토벌할 것을 권했고, 김복한(金福漢)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근주가 면천에 있는 백형의 집에 간 사이에 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등 동지들이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근주는 “의리는 의거(義擧)에 있는바, 이 대사는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둘은 단발의 수치를 갚는 것이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홀로 도피할 수 없으니 자수를 하려고 한다”며 그러나 노모와 형이 “네가 의(義)로써 더불어 나가 죽는 것은 마땅하나 다른 날 다시 도모함만 못하다”라고 하며 다음 기회를 보라고 붙잡아 자수하지 못했다. 다음 해 조의현(趙儀顯) 등이 청양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돌아와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이후로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이 생겼고, 1910년 국치의 비보를 접하고 자결로 항거하고자 했다. 이근주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으나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 걱정이었다. 자신이 벼슬을 하지 않은 포의(布衣, 평민·서민)로 자결을 한다면, 세인들은 “이 사람은 병마에 괴로워 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라고 하여 자신의 처의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에 이근주는 “나의 마음에 살아가지 못할 다섯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성인(聖人)의 도(道)가 막히고 없어진 것이고, 둘은 국운(國運)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셋째는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며, 넷째는 부끄러움이 간절한 것이고, 다섯 번째는 귀와 눈이 모두 싫어하는 것뿐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마음에 하나만 있어도 족히 구차하게 살 수 없는 것이거든, 하물며 겸한 것이겠습니까. 내가 지난날에 말했기 때문에 깊이 대하면서 그대의 경계를 듣고자한 것입니다. 그대의 말은 곧 나라 뜻입니다. 생사고락(生死苦樂)이 어찌 감히 그대와 더불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그대의 깊은 경계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자신의 처의관을 분명히 밝히고 마음을 정리하고 자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백형인 이근하(李根夏)의 환갑이 있어 9월에 들어 중형에게 자결의 뜻을 전했다. 중형이 일개 포의로서 죽는다면 누가 알아주겠느냐고 하자, 제나라 노중련의 고사를 들면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임금의 치욕을 갚지 못함에 죽음으로써 의리를 잡을 뿐이라면서 자결의 뜻을 고했다. 그리고 며칠 후 성묘하러 간다며 주과를 준비해 부모의 묘에 고하고 자결, 순국하였던 것이다. 자결하기 전 나무에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이란 8자를 써 놓았고, 가슴에는 유서가 있었으나 일본경찰이 압수해 갔다. 이것이 1910년 10월 25일의 일이다.

이와 관련해 이근주 열사의 손자인 이강세(경기도 광주시, 도예가)씨는 “할아버지께서 자결하시던 날, ‘산소에 가려하니 과도를 준비하라고 한 뒤에 의연히 떠나셨다’고만 들었다”고 회상하고 ‘이날 천둥소리와 함께 엄청나게 폭우가 쏟아졌다’고 뒤에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압수해간 기록물과 유서를 돌려달라고 홍성경찰서에 탄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살고 있던 중계리의 집마저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아버지는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장곡으로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하면서 “내가 홍성중학교 2학년 때 농업담당 선생님이 저를 보고 ‘열사의 손자’라고 불러 주셨던 당시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홍주의병으로 유학자였던 이근주 열사의 자결, 순국은 민족적 각성의 촉구였으며 민족정신의 표상으로 후세에 영원할 일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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