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성 공격 실패한 동학군, 해미·면천성으로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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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공격 실패한 동학군, 해미·면천성으로 퇴각
  •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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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21>
▲ 오관리 세광아파트와 목빙고 옆에 있는 홍주동학기념비, 홍주동학군은 이곳 고지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있는 홍주성을 공격했다.

동학군, 덕산서 작전회의 갖고 홍주성 공격 결행 추정돼
홍주성전투, 홍주성 4대문과 빙고능선에 걸쳐 배치 격전
동학군, 홍주성 서쪽 빙고능선 배치 일본군을 향해 공격
동학군의 패배, 1년후 홍주의병이 봉기하는데 영향 끼쳐

 

1895년 일본군이 철수한 이후 2월까지도 동학도를 체포하는데 혈안이 됐다. 일본군이 노린 것은 접주들이었으며, 동학을 초멸하려면 간부격인 접주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이는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홍주의 동학군들은 예산으로 진입해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다리(삽교)쪽으로 옮겨가 이 일대를 점령하고 유숙했다고 한다. 1985년 11월 6일의 ‘양호우선봉일기’에는 덕산의 삽교천변에 이르러서 보니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섬도 널려 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을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27일 오후에 발진하여 동군 덕산(德山)의 역촌 뒤뜰에서 유숙하고 익일은 즉, 28일은 대신사주 탄신기도일이라 역촌 후일에서 기도하고 즉발 홍주군(洪州郡)”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관군들은 해미에서 덕산을 거쳐 홍주(洪州)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는 연전연승한 동학군이 27일 저녁에 덕산에 진출하여 작전회의를 갖고 홍주성(洪州城) 공격을 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성 점령, 동학혁명운동 대세에 유리해
동학군 측에서 홍주성(洪州城) 공격을 서두른 것은 첫째, 연전연승으로 동학군의 사기가 충천해 있고, 3만의 대군을 갖추었을 때 결판을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로는 홍주성만 점령하면 충청서부지역에 대한 준행정권과 준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무기와 식량조달이 쉬워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셋째로는 홍주성을 점령하면 동학혁명운동의 대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만일 홍주성(洪州城)을 동학군에게 빼앗기면 공주와 청주를 공격하는 동학군에게 사기를 진작시킴은 물론 일본군의 병력을 분산해야 한다. 한편 그만큼 동학군의 전투력을 길러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군과 관군도 이런 점을 생각해 홍주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할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28일은 대신사 수운 최제우의 탄신 70주년 기념일이라 탄신기도를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서서히 홍주성(洪州城)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삽교에서 홍주성까지는 10여㎞ 정도로 오후 1시경에 출발한 동학군은 오후 4시경 홍주성 외곽에 도착했다. 동학군은 포위전에 돌입해 산과 들을 메우고 대공세를 준비했다. 이렇게 밀려오는 동학군을 지켜보던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 서문 밖에 포진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엄청난 기세에 눌려 몇 차례 교전해 보려다가 모두 홍주성 안으로 철수해 방어에 주력했다. 동학군은 저녁때가 되자 홍주성 밖에 짚단을 쌓아 기어오르기 쉽게 만들었다. 그리고 조양문 밖에는 대포를 설치하고 공격준비를 마쳤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는 1984년 11월 25일의 홍주성 부근의 전투기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곧 홍주성에서 제2분대와 4분대를 동문과 북문에 배치하고, 제3분대와 제3소대의 제1분대를 서문 안에서 빙고(氷庫) 능선에 걸쳐 배치했으며, 제5분대는 북문 왼쪽에, 제3소대의 제2분대는 서문과 남문 중앙으로 산재하게 했다. 빙고 능선의 우리 군 퇴각을 엄호하도록 명령했다. 또 제1분대는 응원부대로 해 남문 뒤쪽 약300여m의 거리를 두고 적의 내습을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 동학군을 8명씩 나누어 각 문의 일본군 병사 사이에 섞어 배치했다. 오후 4시경 일본군은 덕산가도로 통하는 왼쪽고지의 진지를 점령했다. 오후 4시25분경 일본군의 한 부대는 빙고능선을 향해 전진해 왔다. 400여m 전방에 있는 수확이 끝난 논으로 접근해 오자 언덕위에 있던 동학군은 몇 번 일제사격을 퍼부어 일본군 수명을 쓰러뜨렸다.

일본군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일본군의 인원이 많은 것을 믿고 끝내 빙고능선까지 전진해왔다. 중과부적으로 언덕 위에 있던 분대는 퇴각하여 서문의 오른쪽과 왼쪽에 의지해 가까이 다가오는 일본군을 저격했다. 이때 제5분대는 덕산가도로 통하는 서쪽 북문 앞 가까운 고지에 있는 일본군을 향해 일제사격을 세 번 정도 가했다. 800여m 거리에 있던 일본군은 사격소리에 놀라 두 대로 갈라져 도로 동쪽 고지의 숲속에 진을 쳤다. 이때 북문에 배치했던 홍주동학군은 대포 2발을 발사했다. 불과 거리는 300여m에 불과했다. 숲속으로 흩어졌던 일본군은 갈라졌던 두 대열을 합쳤다. 이때 제2분대가 일제사격을 가해 일본군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 동학군의 처형장으로 알려진 북문교에서 멀리보이는 제7일안식일교회까지 사형줄이 걸쳐져 있었다고 한다.


■홍주에서의 동학군, 일본·관군에 결국 패해
이렇듯 홍주성의 공방전은 1차로 홍주성 밖에서 시작했다. 동학군은 먼저 홍주성 서쪽에 있는 빙고능선에 배치돼 있는 일본군을 향해 공격했다. 몇 명이 쓰러졌으나 계속해 공격을 하자 일본군은 이곳을 내주고 홍주성 안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홍주성 북쪽 일대의 능선도 동학군이 공격해 완전히 장악했다. 초전에 일본군을 압박하는 데에는 일단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으로 홍주성의 성문을 닫고 버티는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하기 위한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동학군은 향교 유생7명을 처단하고 여기에 지휘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홍주성을 공격할 대책을 협의했다. 동학군의 화력은 유효거리가 30여m 정도였으므로 포위작전으로 적들을 제압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공격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었다.

‘청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북문 밖 향교촌 후현(後峴) 등지에 유진하고 욕파(慾罷) 홍주성문하고 요지 처에다 대포 수천개수와 단총 수만개를 일시로 발격 공지하되 요지부동”이라 기록했다. 대포가 수천수라 했으나 과장된 것이고, 20~30문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포로 맹렬히 공격했으나 홍주성문을 부수지는 못했다. 차상찬은 잡지 ‘개벽’에 “부득이 수만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박덕칠은 동문을 파하기로 하고, 일반결사대는 인가에서 누만속(累萬束)의 고초를 가져와 홍주성 밖에 적치하고 성을 월하여 격(擊)하려고 결의했다”고 기록했다. 결사대는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동문을 파하기로 하고, 한 부대는 홍주성을 넘기로 했다. 저녁 7시경,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일제히 홍주성을 향해 돌진했다. 일본군과 관군은 홍주성 밑에 쌓아올린 볏짚더미에 불을 질렀으며, 성벽을 기어오르던 동학군은 화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불빛이 환해져 조준하기가 쉬워지자 일본군은 일제히 사격을 가해 많은 동학군들이 쓰러졌다.

동문인 조양문을 공격해 들어가던 결사대도 40여m 지점까지 접근해 대포로 공격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홍주성문이 견고해 포탄까지 맞았으나 끄떡없었다. 얼마 후 일본군은 민가에 불을 질러 대낮 같이 밝히고 노출된 동학군 수백 명을 쓰러뜨렸다. 제아무리 용감한 동학군이라 할지라도 수백 명이 전사하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4시경부터 시작된 공방전은 저녁 8시경까지 계속되다가 동학군은 지쳐서 물러서고 말았다. ‘청산후인조석헌역사’에는 “공격하던 동학군은 부득이 해자시(亥子時, 9시부터 12시까지)에 환퇴 산귀(散歸)하였더라”고 기록했다. 결국 동학군의 10월 28일(양 11월 25일) 홍주성 공격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군의 희생자는 결사대에 참가했던 주동인물들 이었다. 동학군은 스스로 홍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흩어진 동학군들은 해미성과 면천성 쪽으로 나뉘어 흩어졌다.

결과적으로 홍주에서의 동학군도 일본군에 의해 패했던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동학군의 패배는 1년 후 홍주의병(洪州義兵)이 봉기하는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또 홍주의 동학군을 말하면서 홍주출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과의 관계다. 만해의 아버지 ‘한응준이 동학운동 당시 중군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 1967년에 세워진 서울 탑동공원의 ‘용운당대선사비(龍雲堂大禪師碑)’에는 만해(萬海)와 동학(東學)과의 관계를 “~탐관오리의 참탈에 시달리는 민중을 구출하려는 생각으로 동학당운동에 가담하였다.~속가의 아버지와 형은 창의대장 민종식과 함께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포와 홍주를 점령하더니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패속(敗續)하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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