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오천 녹도에도 항일투쟁의 역사가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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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오천 녹도에도 항일투쟁의 역사가 숨 쉰다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0.1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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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8>
▲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의 녹도섬에서도 의병항쟁의 치열했던 역사가 스며있다.

녹도, 바다 내려다보는 언덕에 오밀조밀 하나의 동네 형성
1907년 여름, 조선군·지방 진위대 해산된 병사들 의병항쟁
홍주분견소 병사 6명 홍주성 탈출 옹암포에서 녹도로 향해
일본군 녹도 섬 모두 불태워 주민들 토담집·뜸집 짓고 살아



보령시 오천면 녹도(鹿島)리의 녹도는 섬의 모양이 사슴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녹도라 불리 워 진다고 한다. 녹도는 보령 대천항에서 25km의 거리에 있는 0.9㎢의 조그마한 섬이다. 녹도에 가는 길은 보령 대천어항이나 오천항에서 배를 이용할 수 있으며, 과거에는 광천의 옹암포구(독배)에서도 배를 이용하여 갈 수 있었던 곳이다. 한때 120여 가구 300여명의 비교적 많은 주민이 살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이다. 지금은 40가구 80여명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섬의 모양이 “고개는 서쪽으로 뿔은 동쪽으로 두고 드러누워 있는 사슴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녹도라 불린다.

마한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던 섬으로, 백제 때는 신촌현에 속하였고, 신라 때는 신읍현, 고려 때에 보령현에 속하였다. 조선 말기에는 오천군 하서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 호도리·화사도리를 병합하여 녹도리라 하고 보령시 오천면에 편입되었다. 최고점은 106m로,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주민들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인근의 다른 섬과 달리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고 단결이 잘 되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또한 녹도는 마을이 바다를 내려다보는 언덕위에 오밀조밀하게 하나의 동네로 형성되어 있어 불이 켜진 한 여름 밤에 바다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서구의 옛 성을 연상케 하는 그림 같은 섬이다. 특히 녹도는 주변의 연안일대가 산란기인 봄, 여름에 제주 난류의 북상으로 까나리, 새우, 멸치잡이가 성행하는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김·굴의 양식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녹도(鹿島)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녹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초분(草墳)이라고 해서 시체(屍體)를 짚으로 싸서 나뭇가지로 엮어 모래밭 위에 얹어두는 묘(墓)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녹도리 김성룡 이장에 따르면 “해변(海邊)의 산비탈이나 모래사장에 두는데 이와 같은 방법(方法)을 택한 것은 어업 시(漁業時)에는 땅을 파면 불길(不吉)하다고 해서 수개월 또는 1년, 혹은 10년 후에 본장(本葬)을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풍장(風葬)의 유습(遺習)인데 본장(本葬)은 하지 않고 초장(草葬)이 원장(元葬)이고 또한 본장(本葬)을 하더라도 그것은 탈육(脫肉)된 시골(屍骨)을 수용(收拾)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초분(草墳)의 형태(形態)는 녹도의 전통인데 쉽게 말해서 흙이 적은 섬이라 초분의 형식을 택한 것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고 옛 풍습에 사람의 시체를 파묻는다든가 화장(火葬)을 하면 영혼(靈魂)도 소멸하므로 이를 피하는 방법으로 택하였다 하겠다.

 

▲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마을 전경.

■조선군 해산, 홍주분견소 병사 의병 참여해
우리 민족에게 불운의 시대였던 1907년 여름, 소위 정미7조약이 조인되고 조선(한국)군의 해산이 일어나는 시기 일본군은 지방 진위대(鎭衛隊) 해산에 나선다. 일본군은 1907년 8월 1일 새벽 7시를 기해 조선군의 해산 조칙이 내려진다. 이에 서울시위대(侍衛隊)가 해산됐고, 이에 반대한 조선군들이 항거하면서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시위대를 해산한 일본군은 계속해서 지방 진위대의 해산에 착수했다. 8월 1일 서울시위대 2개 연대 중 2연대 2대대를 제외한 전 부대의 사병을 해산한 이후 일본군은 8월 3일 개성과 청주를 시작으로 10일에는 홍주(洪州)와 원주를 비롯해 9월 3일 북청에 이르기까지 약 한 달간에 걸쳐 해산을 진행함으로써 전 조선(全 朝鮮)에 대한 진위대의 해산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서울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지방 진위대 해산에 있어서도 조선군의 장교를 시켜 탄약과 총기를 압수한 다음 일본군을 파견하여 해산을 감독하고 병영을 접수하였다. 이때 지방 진위대 병사들은 무장해제와 해산에 반대하여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홍주(洪州)분견소의 병사들은 무기를 든 채 집단적으로 병영을 이탈하기에 이른다. 일본군은 이 집단 이탈에 대한 책임을 물어 진위보병(鎭衛步兵) 제2대대 부육군보병부위(附陸軍步兵副尉) 이관식(李觀植)·최한구(崔翰求)가 면관(免官)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봉기가 실패한 병사들은 각자 또는 집단적으로 지방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항쟁(義兵抗爭)의 주역을 이루게 된다.

이즈음 홍주(洪州)분견소 병사 6명은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홍주성(洪州城)을 탈출해 광천의 옹암포구에서 배를 구해 녹도로 향했다. 광천의 옹암포에서 배로 장장 3시간이 넘는 항해를 해서 녹도에 도착했다. 다만 이들이 어찌하여 녹도로 향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군산시지(群山市誌)’에 ‘의병과 함께 무력항쟁을 벌인 조선군 해산 병사들은 각 지방에서 일본인들을 응징했다. 군산 근처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곡매입상인들의 조난사고가 잇따랐고 일본인 가옥들이 전소당하곤 했다. 이에 불안한  군산 거류 일본인들은 숙의 끝에 경비대의 파견을 진정하고 일본인 부윤(府尹)이 상경, 충원하는 바람에 군산에 일본군 12사단 제14연대의 1개 중대가 파견되어 주둔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서 당시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녹도섬에 조선군 병사들이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들은 7명의 확인 정찰대를 파견시켰다. 이들이 섬에 들어와 있는지의 종적을 탐문하였지만 애국심이 강한 섬사람 누구하나 제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런 단서도 못 잡고 다음날 다시 살필 셈으로 선박에서 하룻밤을 선영(船營)하였다. 이때 섬에 있던 진위대원들은 야습을 감행, 대항하는 이들 일본군들을 전멸시켰다. 이 내용이 5일 후 군산이사청(群山理事廳)에 알려졌다. 이 패전이 전 일본인에 알려지자 소동이 벌어졌다. 이에 군산주재 수비대 중대장 이하 전원이 출동했고, 이에 부족하여 거류민들 중에서 의용군까지 모집하여 대거 대선단을 이용하여 녹도에 쳐들어갔다. 당시 녹도에는 100호 정도가 생활하고 있었다. 도민(島民)의 대부분은 일본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집을 비우고 도피했다. 섬에 상륙한 대부대는 섬사람들을 모두 찾아내 학살하고 전도(全島)의 촌락을 전소시켰다. 그때가 1908년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서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녹도항 포구 전경.

■녹도에서도 일본군과 치열한 의병항쟁 벌여
이와 함께 녹도에 전설처럼 전해오는 당시의 상황은 “당시 녹도는 조기·갈치 등의 풍어로 부촌(富村)에 속했다고 한다. 따라서 녹도 근해에는 해적의 출몰도 잦았는데, 이때의 조선군 해산 병사들이 주둔하면서부터 해적 출몰이 뜸했다. 일본군 수색대가 이곳에 와서 모두 몰사했는데 모두가 한 무덤에 묻혔다고 한다.”는 전해오는 얘기를 녹도초 김동화 씨가 채록해 전해오고 있다. 실제로 녹도 주민들은 이곳을 ‘초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이 녹도 포구에 입항하면서 1명이 일어서서 닻을 만지는 것을 장갑진 씨(녹도리 주민)의 마당에 있었던 아름드리 팽나무 뒤에 숨은 조선군의 병사가 쏜 총 한방에 쓰러지자 그를 신호로 복진용 씨(녹도리 주민)의 집 앞에 있는 줄더미 뒤와 축항바위 뒤에 숨었던 조선군이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일본군은 나오지도 못 하고 총질만 하다가 총성이 멎었고 동풍에 왜선(倭船)이 축항 안으로 떠밀려와 가보니 3명은 죽고 4명은 크게 부상을 당했다 한다. 보복이 두려운 조선군과 녹도 주민들은 딴 섬으로 피신했는데 불구였던 붕어할머니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군이 다시 녹도에 진주해 붕어할머니를 위협했으나 원하는 얘기를 듣지 못하자 일본도(日本刀)로 붕어할머니의 팔을 자르기까지 했다고한다. 그리고 일본군은 섬을 모두 불태우고 돌아갔다. 이후에 다시 돌아온 주민들은 급한 대로 토담집과 뜸집 등을 지어 살았는데 지금도 한 채가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조선군 해산 병사들이 어떻게 일본군의 추격을 벗어났는지, 또 살아났다면 그 이후에 어떠한 활동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등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렇듯 토벌 이후의 행적이 밝혀지지 않는 것을 보면 조선군 병사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면서 주민들도 피했을 것이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조선군의 해산과 함께 이들 병사들이 의병(義兵)으로 변해 섬마을에서까지 무력항쟁을 계속했다는 사례는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이는 홍주의병(洪州義兵)이 당진의 소난지도에서 보여준 의병항쟁(義兵抗爭)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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