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오천성에는 과연 대포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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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오천성에는 과연 대포가 있었을까?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7.1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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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11>

남포 출발 의병들 보령 거쳐 광천~결성을 지나 홍주성 공격
“의병들이 대포 2문과 신식 소총을 가지고 홍주성 공격했다”
오천항 군선 100여척 정박, 수군 3000여명이 주둔했던 군항
충청수영성은 충청도 해안방어의 최고 거점이며 수군 지휘부

 

▲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의 오천성. 동서남북 4문이 있었는데 서쪽 망화문터에 입구를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홍예문만 남아있다.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의 본거지다.

남포성에서 홍주의병의 첫 승전보는 홍주성 승전의 서막이었던 셈이다. 남포성 승리의 의미는 일본군과 관군에 대한 승리로 의병들로서는 무혈승리가 아닌 전투로서의 승리였기 때문에 여러 의미나 결과에서 수확이 컸다. 의병들서는 5일 동안의 싸움 끝에 거둔 승리였기때문에 전투경험과 함께 사기도 충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홍주성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으며, 정신적인 요소가 됐을 뿐 아니라 홍주성전투에서 끈질긴 일본군의 공격에도 홍주성을 수성(守城)할 수 있었던 단합과 정신적 기반이 됐던 것이다. 또한 남포성 전투는 관군(官軍)을 의병에 합세시키는 성과도 얻었다. 5일간의 전투에서 남포성의 정부군 31명이 의병진에 투항, 귀순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공주에서 진압군으로 나온 병사들은 상부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투항을 거부하고 퇴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포성 전투에서는 최소한 2000여명의 의병들이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과 관군은 의병세력의 위세에 밀려 싸움을 기피했을 가능성도 제기되는 대목이다. 또 하나 관군들이 의병과의 싸움을 의도적으로 기피했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는 남포성의 병사가 싸움이 끝나면서 귀순한 반면 공주의 병사들은 퇴각한 사실이 이를 방증하는 결과라 하겠다.
이처럼 남포성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의병들은 자신감에 차있었고 또한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다음 전투는 바로 홍주성(洪州城)이었다. 홍주성 전투를 앞두고 소를 잡아먹으며 체력을 비축했던 것이다. 이들은 또 지금의 주산면 간티(艮峙)장터에 집결해 있던 유회병사(儒會兵士) 33명을 영입하고 홍주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 오천성에서 내려다본 오천항 전경.

■홍주성 공격하며 의병들이 대포 사용해
그렇다면 남포를 출발한 의병들은 어디어디를 거쳐서 홍주성을 향했을까. 여기서 진군공격로로 기록되고 있는 길이 오늘의 상황에서는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병기문제와 함께 공격로에 대한 진단 또한 의문으로 남는다. 남포를 출발한 의병들은 보령을 거쳐 결성과 광천을 지난 다음 홍주성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리적으로 남포에서 출발한 의병들은 광천과 결성을 거쳐 홍주성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의문이 가는 점은 홍주성을 공격하며 의병들이 대포를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우리 측 의병지도자들의 기록에는 병기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나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일본 측의 기록에는 “의병들이 대포 2문과 신식 소총을 가지고 홍주성을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홍주성의 4대문에 대포를 걸쳐 놓고 싸웠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정리해 본다면 홍주성 전투에서 등장한 대포의 숫자는 2~4문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의병들은 이 대포를 어디서 구했던 것일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의병들이 대포를 구입한 것은 의병들의 홍주성 공격에 대한 진로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포에서 홍주성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대포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남포나 오천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을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포는 의병이 함락할 당시인 1906년경에는 군수가 주둔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읍성(邑城)의 일부가 남아 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호서지방 해안의 진영으로 전략적 가치 또한 높았던 곳이다. 조선조 태조 6년(1379년)에는 병마첨절제사영 겸 현사(縣事)를 두었고, 우도도만호(右道都萬戶)와 관방을 두어서 서해안의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교통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온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조 12년(1466년)에 진을 없애고 현(縣)을 두었던 곳이 남포이다. 이러한 사실이라면 남포에는 대포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의병지도자들도 남포에서의 승리를 기록하며 의병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병기획득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서천에서의 양총 20자루를 획득한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남포에서는 그 이상의 병기획득은 사실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오천성에서 대포 획득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보령 오천항에서 대포를 획득하지 않았을까. 홍주성 공격에서 대포가 사용됐다는 사실은 그 이전 어느 곳에선가, 어떻게든 대포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천은 태조 5년(1405)에 수군절도사(水軍節都使)가 있던 고을로 충청도에는 수군절도사를 한명을 두었는데, 그 수군절도사가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던 곳이 바로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인 것이다.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자리하면서 처음 군영이 설치되었고, 중종 4년(1509) 서해안 방어기지로 쌓기 시작한 오천항은 무려 16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높이 3m, 길이가 3000m나 되는 오천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정3품관의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수군절도사영(水軍節都使營)의 본거지가 되었다. 따라서 오천항에는 군선 100여 척이 정박하고, 수군도 3000여명이 항상 주둔했던 군항이다. 고종 광무 5년(1901년)에 충청수군절도사가 영(營) 터를 중심으로 군(郡)이 신설돼 군청소재지가 됐던 곳이다.
지금은 오천초등학교 뒤편으로 ‘오천성(鰲川城)’ 위에 올라서면 천수만과 정겨운 오천항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오천은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로 이용됐던 곳이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 창구로서 이름이 높았고,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수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영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 중종 15년(1510)에 성이 만들어지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영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 성에는 건립 당시 4개의 문이 있었고 많은 건물이 들어앉았다. 임진왜란 당시 오천수영 수군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진주대첩은 충청수군에게 비극적인 전투가 되고 말았는데, 당시 고립된 진주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이던 충청수사 황진과 휘하의 수군 대부분은 옥쇄했던 것이다. 이후 오천성은 텅 빈 채로 방치되다시피 했고, 1895년에 수영이 폐지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서문에 해당하는 망화문지와 백성을 돌보던 진휼청,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장교청만이 남아있다.
따라서 오천지역은 조선시대에 수군절도사가 충청도 여러 속진을 지휘하여 충청도 해안을 방어하던 ‘충청수영’이 위치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서해안의 외적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천혜의 요새지역 이었기에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이 있었다는 점과 성(城)이 바다 쪽을 향한 만큼 대포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대목이다.

■충청수영성, 충청도 해안방어 최고 거점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500년간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였던 보령 ‘오천성(鰲川城)’은 산성(山城)인지, 진성(鎭城)인지, 읍성(邑城)인지는 몰라도 수많은 성(城) 중의 하나로만 가볍게 인식되어 지나치게 되다가도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이라는 중요성을 알게 되면 충청수영성이 있는 오천이 충청도 해안 방어의 최고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금방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충청수영성은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보령시 이명희 문화관광해설사는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 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며 “오천성은 현재 성벽 일부와 서문에 해당하는 망화문지, 그리고 충청수군절도사와 장교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장교청 건물과 백성을 돌보던 진휼청만이 남아 있다. 갈매못에서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신부들이 처형된 장소가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형장(刑場)은 바로 주둔군의 훈련장이었다. 오천성은 당초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중종 5년에 이장생이 16년간에 걸쳐 돌로 축성하였다”는 설명이다. 오천성과 인접한 오천항은 보령시의 어항 중 대천항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곳이다. 오천항과 맞붙은 보령호는 2000년 12월 보령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조성된 인공호수이며, 우측으로는 홍보지구 간척사업 제방이 들어섰다. 옛날에는 이곳을 통해 광천 옹암포까지 새우젓배가 드나들었다.
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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