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의 역사가 깃든 작은 섬 ‘소난지도 의병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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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항쟁의 역사가 깃든 작은 섬 ‘소난지도 의병총’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6.06.1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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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홍주의병사, 치열했던 구국항쟁의 진원지 탐사 <9>

‘의병운동은 독립운동의 도화선’규정 1945년 광복 이끌어
1906년 홍주의병전투 패한 의병들 소난지도 중심 활동해
소난지도 의병 1908년 3월 일본경찰대 기습 공격에 전멸
소난지도의병항쟁 당진지역 교직·사학자들 노력으로 발굴

 

▲ 소난지도의병총.

충남 당진의 난지도는 대호방조제의 북쪽에 있는 섬으로 대난지도와 소난지도가 있다. 대난지도는 당진시에서 가장 큰 섬으로 여름철이면 난지도해수욕장을 찾는 사람이 많고 또 낚시터로 이름이 알려진 곳이다. 물이 맑고 주변 환경이 깨끗해 갈수록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난지도로 들어가려면 도비도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도비도가 있는 당진으로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송악나들목이 있는데, 이곳 송악나들목을 나오면 38번 국도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고대방향으로 길을 계속 달리면 633번 지방도로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하여 달리면 석문방조제이다. 방조제를 지나 계속 달리다가 삼봉사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하여 계속 직진하면 왜목마을을 지나 대호방조제가 나온다. 이 대호방조제의 끝부분에 도비도 휴양지와 선착장이 있다. 이곳에서 대난지도와 소난지도로 들어가려면 도비도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하는데,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소난지도는 대난지도 앞에 떠 있는 작은 섬이다. 소난지도는 대난지도 옆 작은 섬이라 하여 소난지도라 하고, 난초와 지초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난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고 바위틈에서 고란초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섬의 동쪽 끝 바닷가에는 을사조약에 반기를 들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홍일초 휘하의 150여 의병이 잠든 ‘소난지도 의병총’이 있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반하는 배가 있었을 때는 100여 척이나 정박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이 일대에는 난지도, 도비도, 소조도, 대조도, 우무도, 비경도, 분도, 철도, 소난지도, 대난지도 도합 9개의 섬이 있다. 소난지도는 환상적인 낙조와 해돋이를 볼 수 있으며, 사계절 바다낚시를 즐길 수가 있다. 물이 빠지면 온통 갯벌로 둘러싸여 갯벌 사이로 수로의 일종인 갯골이 나온다. 생태계를 정화시키고 있는 시커먼 갯벌 속에는 여러 가지 어패류들이 살고 있어 봄과 가을에는 바다낚시와 바지락 캐기, 갯벌탐험, 유람선 등을 이용할 수 있고, 여름에는 수상레저와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겨울에는 바다낚시, 굴 따기, 낙지잡이를 할 수가 있다. 바다 바로 앞에 목조건물, 펜션, 방갈로 등 숙박시설이 있다. 파도가 해조음을 물고 매섭게 달려드는 바닷가, 자식 같은 섬을 옹기종기 품고 있어 모성을 떠올리게 하는 소난지도에 울려 퍼지는 또 다른 함성에 귀기울여 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소난지도 의병 피맺힌 항쟁사 되살아나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의병운동은 독립운동의 도화선’이라고 규정했다. 이 말처럼 구한말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국내외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당시 선비들과 민초들의 목숨을 초개같이 내던진 자발적인 구국운동은 일제강점기 36년을 끝내고 결국 1945년 광복을 이끌어낸 계기가 됐다.
수많은 의병항쟁 중에서 의병정신을 잘 나타내는 것이 당진의 소난지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의병운동이다. 특히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이곳 의병항쟁의 구체적 기록이 발견돼 큰 관심을 모았으며, 의병사적 기록의 가치를 찾았다는 의미도 컸다. 잘게 부서진 흰 조개껍데기와 모래 백사장 등 아름답고 평온한 풍광으로 둘러싸인 면적 2.63㎢의 이 섬은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항일 투쟁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소난지도 산 21번지, 둠바벌 바닷가에는 이곳에서 전사한 150여명의 의병 유골을 합장한 ‘소난지도의병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병총에 묻힌 사람들은 1907년 경기도 수원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벌이다 일제에 쫓겨난 의병과 1906년 홍주성 의병전투에서 패한 의병들은 소난지도를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벌이며 재기를 도모하다 1908년 3월 이곳을 기습 공격한 일본 경찰대에 전멸 당했다.
이러한 소난지도 의병항쟁이 햇빛을 본 것은 당진지역 교직자들과 사학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전설과 구전으로만 떠돌다 묻힐 뻔했다. 1970년 당진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과 김부영 교장이 현지답사를 시작한 이래 3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소난지도 의병들의 피맺힌 항쟁사가 되살아났던 것이다. 1973년 당시 역사를 가르치며 고증사료 조사 등 실무 작업을 벌인 사람이 지금의 석문중학교 신양웅 교장이다.
신 교장은 “아버님(신이균 이사장・1999년 작고)께서 1930년대 소난지도에서 언문강사로 일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의병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발굴 계기가 됐다”며 “1978년 교로리에 살던 조예원 옹으로부터 1908년 3월 14일 소난지도전투 당시의 증언과 함께 한국유적총람(문공부 편)에서 의병총에 관한 간략한 기록을 확인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신 교장은 “석문중학교 재단과 교직원은 의병총비 건립을 추진하게 됐다”며 “당시 주민들이 유골이 약재가 된다는 미신 때문에 의병총을 도굴한 데다 봉분은 바닷물에 씻겨 없어진 상태였다”고 설명하고 “방치된 유골들을 하나둘씩 수습하고 교직원과 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1982년 의병총을 세웠다”고 말했다. 의병총 건립 뒤에도 신 교장 등은 소난지도 의병운동의 실체규명 작업을 계속 벌여나갔다. 1997년에는 ‘소난지의병항쟁기념사업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사료 발굴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지난 2002년 기념사업회 학술담당 박상건 부회장이 ‘소난지도 전투상황보고’ 문서를 발견했고, 학술고증 용역을 의뢰받은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가 황성신문 보도 등을 추가 발굴해 역사적 실체가 뚜렷해졌다는 것. 신양웅 교장에 따르면 당시 목격자들은 “온 종일 총소리가 콩 볶는듯하였고 피맺힌 절규와 비명소리가 진동하였으며 화약 연기가 온 섬을 뒤덮었으며, 격전지 맞은편인 교로리와 삼길포에서는 어부들의 그물에 의병들의 시신이 걸려 올려지기도 했다”고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어난 소난지도 의병들을 상징하는 조형물.

■소난지도 전투상황, 황성신문 보도 근거
한편 당시 일제의 홍주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소난지도 전투상황보고’를 보면 당시 의병들의 고초와 대일항쟁, 굴하지 않는 의병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당진군 소난지도에서 폭도를 토벌한 것을 보고한다. 이 폭도는 작년(1907년) 가을부터 경기도 수원군을 오가며 난지도 부근 도서에 자주 상륙했다. (1908년 3월) 15일 오전 6시 소난지도에 도착, 정찰 중에 적은 민가 좌우에서 발포했다. 적은 완강히 저항했다. 추적해 접전하기를 수십 번 했다. 적의 대부분을 이 섬 동남의 돌각(突角)까지 추격, 22명을 죽였다. 북방일대 바위 동굴 속에 잠복한 적이 다시 맹렬히 사격해 5명을 죽였다. 또 14명을 돌각으로 압박해 죽였다. 바다에 투신한 적이 50명 내외였으며 전멸한 것으로 보인다. 부상당한 적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의병으로 양식 준비를 하고 봄에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타 방면의 도당과 연락하여 크게 활동할 예정이었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일본 경찰은 시종일관 의병들을 폭도와 해적으로 묘사, 토벌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세부 기록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선원과 부상한 의병까지 학살, 잔학상을 그대로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충청문화연구소는 홍주분서장 보고 내용을 바탕으로 쓰인 ‘황성신문, 1908년 3월 24일자 기사’를 발굴해 실체적으로 항쟁을 규명해 내기에 이르렀다. 당시 학술고증작업을 벌인 충남대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는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해 인근 당진·서산·태안뿐만 아니라 화성·수원까지 해상으로 이동하면서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충청·경기지역에서도 해상의병운동이 벌어졌다는 데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며 “이들 의병은 수적(水賊)을 의병에 영입해 전투력을 높였으며 전기 의병의 한계로 지목된 신분간의 차이에 따른 문제를 극복했다”면서 “의병 대부분이 평민이었음이 이를 입증한다”고 밝힌바 있다.
신양웅 교장은 “소난지도 의병은 1907년 군대해산과 고종퇴위 이후 일어난 제3기 의병으로 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싸운 의병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 해상투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한말의 삼별초라 할 수 있다”면서 “소난지도 의병과 당진일대에서 활약한 의병 전체에 대한 역사적 고증 작업을 체계적으로 벌여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한관우/사진=김경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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