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화첩들, 늘 새로운 자신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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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의 화첩들, 늘 새로운 자신을 기록하다
  • 황찬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10.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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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찬연DTC아트센터 예술감독칼럼·독자위원
황찬연
DTC아트센터 예술감독칼럼·독자위원

고암 이응노 화백은 늘 자신을 기록했다. 이응노는 자신이 세계와 관계 맺고 있는 다양한 방식들, 형식들, 모양들을 남겼는데, 풍경 스케치, 신문 칼럼, 신문 삽화, 기행문 등이 있다. 그의 유년과 청년시절은 식민지 시대였고, 중년에는 조국해방과 한국전쟁, 군사정권의 시대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전후시대의 비극적 시대상과 세계 민주주의 운동의 흐름 등을 직접 경험하며 극도로 혼란한 시간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늘 변화무쌍해가는 자신의 말과 생각과 그림들을 그러모으며 책을 만들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자신의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 커다란 힘이 됐을 것이다. 

정물-종이 위에 수묵, 수채 등, 연도미상.

이응노가 1950년대 주요 신문 칼럼을 통해 한국미술계의 현재를 증언하며 자신의 오롯한 견해를 당당하게 밝히는 태도에서 그는 분명 자신의 주인이었다. 일례로 조선일보 1957년 10월 1일자 신문에는 <국전의 정화를 위하여>라는 칼럼을 게재했는데, “첫째로 매회 그 심위의 구성이 소아적이요, 퇴영적인 몇몇 사람의 자기유지에서 비롯된 인사 들인 것이며, 둘째로 전체 미술인의 의사와 배치되며 미술계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퇴보를 가져오기에 알맞은 성분의 것이며, 셋째로 초대 및 추전작가의 지정기준이 -중략- 지정추천자와 지정추정을 당하는 자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라고 당시 ‘대한민국 미술대전 제6회 심위선임 발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시대가 이념의 분쟁과 폭력, 억압이 만행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보통의 강단으로는 행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렇듯 이응노는 소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노예의 도덕을 버리고 주체로서의 주인된 도덕을 택했다. 분명히 매일 매일 자신의 현재를 기록하고 자신을 성찰했던 이응노에게 있어 기록은 사유의 환기처이자 몸과 마음의 의지처가 됐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늘 이응노 자신에게 흐름이 정지하는 것, 상투적인 것,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게 했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끊임없이 가두는 장벽을 늘 넘어서 나아간 것이다. 
 

이응노 화백 석방 관련 기사(1960년대).

이응노는 수십 권의 자료집을 남겼는데, 늘 곁에 두고 다녔던 사생첩, 자신의 신문 칼럼이나 신문 기사를 모은 신문첩 등이 있다. 사생첩의 경우 일본 유학시기(1936~1944)에 그가 탐구했던 다양한 미술형식이 나타나며, 당시 한국미술계에 유행했던 입체파, 미래주의, 추상표현 양식 등이 나타나 있어서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두 권의 신문첩이 있는데, 한 권은 1920~1950년대로, 식민지 시대에 활동 기록이 남겨져 있다. 그리고 1950년대 중심의 사진첩에는 한국 미술계에 나타난 여러 미술운동에 대한 기록과 동백림 사건 관련 자료가 수록돼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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