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奴婢)의 불꽃-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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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奴婢)의 불꽃-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3.08.2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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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11>

 

 

 

 

 

지은(知恩)하신 모습
가장 아끼고 소중한 울림으로
생명의 더운 피는 언제나
연이어 흐르고 있나니
아, 맨 처음의 만남에서부터
갸기부리지* 않았다
바람 지나도 기웃하지 않고
눈보라 몰려와도
둥지를 잃은 적 전혀 없다
새로 태어나는 지금은
참되고 맑은 하늘빛으로
길을 밝혀주고 북돋아줄 때
이제부터 깊고 중심 되는
한(恨)없는 불꽃으로 타올라라
땅속 깊이 뻗어 들어가
아침마다 자위뜨는* 일도 없이
하늘로 치솟는 줄기 끝마다
한(限)없는 불꽃을 피우게 하라 


* 갸기부리다 : 밉살스럽게 뽐내며 교만한 태도를 나타내다
* 자위뜨다 : 무거운 물건이 힘을 받아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12에 위치한 도지정기념물 제 76호(1989년 12월 29일 지정)인 백야(白冶) 김좌진(金左鎭) 장군 생가지는 그가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고종26년(1889) 선원 김상용의 10세손인 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 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에는 이미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특히 근대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은 18세의 나이에 자신의 집에서 부리는 노복을 해방시키고 노비 문서를 태워 없앴는가 하면 자신의 토지를 소작인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주기까지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신대로 추진함으로써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8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맞아 7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3000여명을 살상하는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승기록을 세웠다.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 부근의 정미소 앞에서 동지였던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생가지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의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또 사당인 백야사(白冶祠)를 1998~2001년까지 2880평의 부지에 내ㆍ외삼문, 제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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