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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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임 예찬
  • 김상구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4.02.20 11:0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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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 하기엔 아직 이른듯하지만 다음 주면 대학엔 새내기들이 설레임을 안고 교정을 서성일 것이다. 그들의 얼굴엔 이미 봄이 완연하고 대학가는 새로운 에너지로 꿈틀댈 것이다. 입시전쟁에서 벗어난 새내기들이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대학주변을 활기차게 하기 때문이다. 설레임이 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이고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다는 증좌(證左)이기도 하다. 새내기들이 대학 4년 동안 이 피 끓는 설레임의 에너지를 어떻게 쏟아 내는가는 자신의 미래와 연결될 수 있다. 가슴이 고동치는 청춘의 4년은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4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자신의 풍요로운 삶과 연결된다.

대학 4년은 빈공간이다. 자신이 그곳에 새로운 그림을 멋지게 그리는 것이다.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 먼저 새내기들은 전공하는 학과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요즘은 융합이다, 통섭이다 하여 이것저것 다른 학문을 기웃거리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중요한 일은 자신의 전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융합은 자신의 학문을 중심으로 필요한 인접학문들을 창조적으로 끌어오는 것이지 이것저것 모아 맛없는 섞어찌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코울리지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력이고, 공상(fancy)이란 이것저것 섞어놓는 기계적 결합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융합은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창조하는 것처럼 상상력이 늘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이것은 예술창조의 세계와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전공공부에 매진하여 실력이 있을 때 융합도 가능하다.

그러나 전공에만 매몰되는 것도 경계해야한다. 즉 ‘동굴의 우상’에 빠져서는 다양한 가치가 충돌·변화하는 시기에 유연성을 놓치기 쉽다. 스마트폰과 같이 서로 다른 기능과 기술이 다양하게 결합하는 현상이 보편화되는 시기에 한 우물만 들여다보고 있어서는 곤란하다. 인접학문과 함께 교양과목을 심도 있게 공부해야 한다. 대학에서 교양은 주로 동서양의 고전작품을 가리킨다.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교양과목으로 동서양의 주요 고전작품을 주로 읽히는 까닭은 고전작품이 위기에 처한 개인에게 슬기로운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고전을 의미하는 ‘클래식(classic)’이라는 말은 라틴어 ‘클래시쿠스(classicus)’에서 유래했는데 이 말은 로마가 전쟁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국가를 위해 군함을 그것도 한척이 아니라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富豪)를 가리켰다. 다시 말해 전쟁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 국가에 도움을 주는 재력가를 가리켰던 것처럼 인생의 큰 위기에 당면했을 때 정신적 힘을 주는 책을 의미한다. 대학 시절에 동서양의 많은 고전을 심도 있게 읽으며 당당하고 기품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야 한다. 흥미 있고 쉬운 기능 강좌는 졸업 후에도 각 지자체에서 개설하는 시민강좌에서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

21세기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노매딕(nomadic)’이다. 즉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언급하는 ‘유목민적’이라는 말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 자유롭게 왕래·소통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의 잦은 이동과 소통은 언어의 통일을 가속화 시켰다. 영어가 점점 국제어로 자리잡아가는 것은 이러한 것에 연유한다. 세계 속에 자신을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어만큼은 편하게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학 4년 동안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영어를 소홀히 해서는 어렵게 취직 했다 하더라도 그 자리를 보전하기조차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토익 책만 옆구리에 끼고 대학 4년 내내 도서관에 엎드려 취업만 걱정하는 패기 없는 젊은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학 4년은 훌륭한 사람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모방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창조는 모방을 통해서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자신의 롤 모델이 있거나 훌륭한 멘토의 안내와 후원이 있었다. 새로 만나는 지도교수는 새내기들의 멘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지도교수라 해서 자동적으로 멘토가 되는 것은 아니며 서로의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충일(充溢)할 때 가능하다. 설레임은 노년이 되면 우리 곁에서 멀리 달아나려고 한다. 설레임은 미래가 많이 남아있을 때 커지기 때문이다. 설레임이 있을 때 멋진 그림도 가능하다. 그러나 거선(巨船)의 기관같은 심장이 뛰노는 청춘이라 할지라도 학문에 설레임과 열정을 오래 유지하는 일은 도 닦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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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2014-03-07 16:42:19
얼마전 학생이 찾아와 왜 사회에서 쓰지도 않을 전공 용어를 배워야 하느냐고 하소연 하더군요. 그냥 씩 미소를 지으며 살다보면 전공 지식도 필요할 거라도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내 맘 속엔 굴뚝같이 다시 되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도대체 너는 대학교에 왜 다니니?" 여기저기서 취업 취업 거리니까 학교가 직업교육원 쯤으로 보이나 봅니다.
교수님의 좋은 글이 작으나마 위안거리가 될 거 같습니다

동현킴 2014-02-25 10:26:41
필력이 굉장하십니다.
좋은글귀 얻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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