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15>
김승호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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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15>
김승호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장윤수·김경미 기자
  • 승인 2015.11.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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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호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네 이야기로 문화적 자긍심 키워나가야”

▲ 동국대학교 국어교육과 김승호 교수.


어린 시절 듣던 옛 이야기가 고전문학 전공으로
교사와 기자 생활 거쳐 동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 초만 해도 홍성은 서울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죠. 과외나 학원도 따로 없었고요. 다들 뛰어노는데 분주했고, 그나마 공부를 좀 한다던 친구들은 공주나 대전 사대부고로 가곤 했습니다.”

김승호 동국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홍성 출신으로, 구항초등학교와 홍성중학교, 홍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김 교수가 홍성고에 재학 중이던 1971년 11월, 갑자기 학교에 불이 붙었다. 강풍이 불면서 불은 학교 전체로 확대됐고, 일제시대에 목조로 지어졌던 학교건물은 순식간에 전소되고 말았다. “그 때 제가 1학년이었는데, 학교가 전부 타버리는 바람에 강당에 칸막이를 세워놓고 6개 교실이 마련됐죠. 아주 난장판이었고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어수선하게 고등학교 학창시절을 보낸 김 교수는 3학년이 되면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 보니 공부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홍일표 국회의원 등 김 교수보다 1년 선배들은 나름대로 좋은 학교에 많이 진학했지만, 김 교수 학년 학생들은 중위권 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고 김 교수는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국어선생님께서 ‘너는 국어에 적성이 잘 맞고, 점수가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생각나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또 동대 국문과에는 나름대로 문인도 많고 해서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진학을 하게 됐죠.” 국문과에 진학한 김 교수는 글을 쓸지, 공부를 할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김 교수는 글을 쓰는 것 보다는 공부를 하는데 더 흥미를 느꼈고, 졸업할 때 쯤 교사자격증을 취득해 잠시 교단에 서기도 했다.“교직 생활을 잠깐 동안 하고, 한국일보에 들어가 10여 년간 편집부 기자 생활을 시작했죠.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는데, 편집부 기자를 하면 개인 시간도 충분하고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다는 말에 근무를 했었습니다.”

창작보다 국문학 공부가 더 재밌었다는 김 교수는 교수가 되기로 마음 먹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해 박사과정까지 마쳤다. 그러나 교수 자리가 잘 나지 않아, 김 교수는 잠시 동안 하려고 마음먹었던 기자생활을 10여 년이 넘도록 계속하게 됐다.

“그래도 요즘 사람들보다는 복을 많이 누린 편입니다. 과거엔 어딜 가나 일자리가 많았죠. 요즘 학생들을 보면 딱한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교사로 임용을 받기 위해서도 3년에서 4년은 공부를 해야 하잖아요. 교사들이 문학에 재미를 느끼고 창작에 열의를 느껴야 학생들에게도 덩달아 그 재미를 전할 수 있을텐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 교수로써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도 많습니다.”

김 교수는 교사 임용을 앞둔 학생들에게 책이나 소설을 많이 읽고 자기 체험을 넓혀가라고 조언했다. 또 김 교수는 자신이 고전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어린 시절의 체험이나 기억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시골 생활을 한 것은 20년이 채 안됩니다. 오히려 서울로 상경해 산지가 벌써 40년이 됐으니 더 길죠. 그럼에도 시골 특유의 느린 문화권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체험과 기억이 고전과 잘 어우러질 수 있게 된 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 교수는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천천히 가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더 좋다”면서 “요즘 학생들은 고전은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을 갖거나 한자나 고어를 알아야하기 때문에 기피하는데, 우리 조상들의 시조나 한시를 통해 과거의 선조들의 생활 속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고 말했다.

 

▲ 김승호 교수의 제자들이 홍성군청소년수련관을 찾아 글쓰기에 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홍성만의 역사인물들과 스토리에 자긍심 가져야
“이야기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할 뿐”


현대 사회에서 청년·청소년들의 인성 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범죄율도 나날이 증가해가고 있는데,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어떤 문화권에서 어떤 생활습관을 갖도록 키웠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홍성은 한말 의병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입니다. 의사나 치사가 많아 지금까지도 자랑이 되고 있죠. 옛날 문헌에 보면 땅이 척박하고 물산이 풍부하지 못한 지역이 홍성입니다. 그렇지만, 환경 조건이 좋지 않으면 인물이 많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 교수는 성삼문이나 손곡 이달의 예를 들었다. 허균의 선생님 역할을 한 손곡 이달은 머리가 비상해 양천 허 씨, 허균 집안에 들어가 가정교사를 맡기도 했다. 지금도 남산공원에는 김종옥 선생이 발의해 세워진 이달의 시비가 있다. 또 백야 김좌진 장군이나 만해 한용운 선사는 국가적 독립투사로 익히 알려진 인물들이다. 이처럼 근대기 의병활동이 활발하고 유명한 인물들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김 교수는 점차 잊혀져가는 우리의 고전과 전통 문화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과거에는 채록을 하러 다니면 동네에 전해내려오는 전설이나 설화, 민담을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점차 그분들이 돌아가시면서 구비로 전해오던 방언이나 전설, 민요 등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죠. 요즘 사람들은 설화나 전설엔 관심도 없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학생들을 통해 우리의 옛 흔적을 남기기 위해 답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김 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국어교육과 학생들은 지난달 17일 홍성군청소년수련관 태양우주방과후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즐거운 글쓰기’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홍성을 비롯해 주변 지역인 청양, 서산 등을 다니며 고전 채록이나 고택, 문화재 답사 등을 진행한 바 있다. 불교문학과 삼국유사가 전문 분야인 김 교수는 1960년대에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옛 시골 풍경을 떠올리면 증조부를 비롯해 마을 어르신들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수염을 기르신 채 곰방대를 쓰시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방에 오신 어르신들이 시조나 창을 하셨는데, 그 때 어린 마음엔 민요도 아니고 대중가요도 아닌 저게 대체 무언가 싶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일상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시조나 창을 항상 즐겼습니다. 암암리에 그런 영향력이 지금의 제게 미친 것이겠죠.” 또한 김 교수는 어르신들이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나, 귀신 이야기, 김좌진 장군 이야기, 동네의 설화나 전설 등을 들으며 자랐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도 없던 시절엔 어린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가장 재밌게 들으며 자랐던 것이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고전문학과 관련된 80여 편의 논문을 저술하고, 단독저서 7권과 다수의 공동저서를 저술했다. 정년퇴직 때까지 100편의 논문을 저술할 계획이라는 김 교수는 자료가 많지 않은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문학들을 중점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홍성도 나름의 이야기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관내 어린 청소년들을 위해 부드러운 문체로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니까요. 지방자치 시대에 발맞춰 문화적 자긍심을 키우고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유산들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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