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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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11.05.26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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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는 단어는 의문(물음)과 반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문이 과학과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면, 인간의 심성에 바탕을 둔 반성은 학문과 문화적 측면에 강하게 작용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세기적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최근 “사후의 세계나 천국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스티븐 호킹’이라는 한 인간이 던진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우주물리학이 점차 사실과 가깝게 발전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스티븐 호킹의 ‘왜’는 뉴턴이 생각했던 ‘왜’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뉴턴은 우주에는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 있고 어떤 법칙성에 의해서 운행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뉴턴의 ‘왜’는 서양학문의 일반이 그렇듯이 우주를 설계하고 운행하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스티븐 호킹이나 아인슈타인은 우주에는 어떤 법칙성이나 설계한 절대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대적 작용에 의해서 움직인다(변하고 있다)에 기초하여 관측되고 인식 가능한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뉴턴의 물리학은 우주의 본질보다는 창조주에 의해서 이미 설계되어 져 있는 우주의 설계도를 찾아가는 입장에 있었다면, 스티븐 호킹은 처음부터 어떤 가설이나 창조주를 부정하고 인식 가능한 것에서부터 우주본질 그 자체를 이해하려 했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뉴턴은 주관적(경험에서 얻어진 개인의 판단체계) 입장에서 이미 설정되어진 객관의 세계를 발견했다고 착각하여 자신이 밝힌 물리학을 법칙(진리)으로서 확정지으려 했다면, 스티븐 호킹은 주관적 생각을 결론을 내리거나 확정짓지 않고 경험적 사실을 끊임없이 적용시켜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나 삶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뉴턴의 ‘왜’는 사유의 폭이 좁고, 편협하며 확정적 운명이나 숙명론에 가깝게 나타나고, 스티븐 호킹의 ‘왜’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며 인간이 주인이 되는 다양한 변화의 삶을 가능케 한다.

뉴턴적 오류의 대표적인 예는 역사인식에 있어서 종교적 신념에 의한 죽음이라고 불리는 순교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종교집단은 자신들의 죽음은 순교라고 높이 받들고 객관화 시키려 하지만, 정작 자신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과 침략으로 파괴된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다. 이것은 뉴턴의 물리학이 우주설계자가 존재한다는 틀 속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신념체계를 절대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을 사실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왜’의 반성적 의미에 대해서 말해볼까 한다. ‘왜’의 반성적 의미란 현실에 대한 자각을 말한다. 그래서 ‘왜’의 반성적 의미를 ‘참회’라는 말로 표현한다. 참회의 ‘참’은 지난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며, ‘회’는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그래서 ‘참회’는 현실적 자각, 과거에 대한 관조, 미래의 변화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해서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 자신 안에 과거·현재·미래가 들어있고, 현재를 바꾸면 과거와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술버릇이 나빠서 사업과 인간관계가 나빠졌다고 하자. 여기에 대해 현실적 자각을 하고, 술을 끊는 순간 더 이상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오는 술버릇은 사라지며, 미래 역시 달라진다. 그런데 현실적 자각인 ‘참’만 있고 변화와 실천의 ‘회’가 없다면 술로 인한 악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뉴턴과 스티븐 호킹의 ‘왜’는 객관에 대한 사유방식의 차이였다면, 참회의 ‘왜’는 내면적 자각과 실천을 말한다. 과거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은 자각과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그러나 그에 따르는 실천이 미흡해서 5·16쿠데타와 전두환에 이은 노태우의 군부독재가 이어졌으며,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 가치를 실현하고, 민중의 편에 서려고 했던 정부는 외부적 요인은 제쳐 두고라도 자체분열이라고 할 만큼 계파 간 지나친 다양성을 주장함으로써 민중을 자각시켜 민주사회를 만드는데 실패하였다.

다시 ‘왜’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라는 질문에 있어서 뉴턴처럼 미리 어떤 한계를 결정 지워 놓고 거기에 맞추려 해서도 안 되고, ‘왜’라는 반성에 있어서 자신의 자각과 변화된 실천 없이 다른 사람을 변하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내 개인의 입장에서의 ‘왜’가 아니라 누구나 동의할 수 있고, 인식과 실천 가능한 세계에서의 ‘왜’라는 질문과 반성이다.

이처럼 ‘왜’는 질문이든 반성이든 현실과 자신에 대한 올바른 자각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내 자신과 우리사회에 대해서 ‘왜’라는 의문을 통해 미래 발전을 모색해 나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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