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모든 차별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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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모든 차별을 불러온다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6.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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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올리비아 뉴먼, 2022)’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습지를 배경으로 하는 델리아 오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소설도 그렇지만 영화도 다층적으로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이 영화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독학으로 생태학자가 된 주인공 카야의 성장담, 그녀와 두 남자 사이의 사랑과 갈등을 담은 로맨스, 두 남자 중 한 남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 법정 스릴러 등 여러 겹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 작품을 두고 대중소설 형식들의 유려한 황금 배합,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흡입력, 신비로운 배경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물 있는 배경 등 장점이 너무나 많다고 평했다. 그런데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호모 사케르’, 차별, 배제, 혐오 등 부정적인 단어들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 물론 이 소설과 영화가 부정적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소외시키고 멀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차별’이다. 그 누구도 차별 금지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성별, 인종, 장애, 외모, 출신지, 국적, 가족 형태, 성적 지향, 성 정체성, 학력, 종교 등을 이유로 차별한다. 하나의 차별을 예외로 인정하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차별이 정당화될 수 있다. 차별의 구체적 사례는 학교, 사회, 소모임 등 거의 모든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신이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더 나아가 차별은 학습되고 확산되기 때문에 윤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마땅히 금지돼야 한다. 차별 금지를 법제화한 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합리적 이유가 없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차별금지법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는 특정 직군, 특정 분야에서 성차별, 장애인차별 등의 금지를 규정한 기존 법들로는 충분치 않기에 생활 속 모든 영역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을 법으로 금지해 민권을 보호하자는 취지를 가진다. 하지만 2007년 제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래 출범하는 국회마다 법률 및 조례가 발의됐다. 하지만 현재까지 포괄적인 수준의 차별 금지를 규정하는 법안이 통과된 적이 없고 제정된다고 하더라도 통과될 가능성도 작다.

차별금지법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싸고 찬성 또는 반대 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찬성 측에서는 차별금지법이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기에 하루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 측에서는 차별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에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항상 좋을 수 없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1651)’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때때로 몸, 말, 마음 등으로 서로 다툰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툼은 다툼으로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차별은 다르다. 차별은 시간이 지나면 풀어지는 게 아니라 더욱 굳어진다. 심한 경우 차별은 혐오로 발전한다. 누군가는 차별하고 누군가는 차별당한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차별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기에 모두를 위해 차별을 금지하자는 게 차별금지법의 근본 취지다. 즉 차별금지법은 모두를 위한 법이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카야는 “자연에는 선악이 없다”고 역설하며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는 사마귀 그림을 출판한다. 카야의 이 말은 ‘인간관계에서는 선악이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주지하듯 인간관계에서 선악은 절대적이지 않다. 선악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심지어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거기에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작동하면 역사가 예거하듯 끔찍하고 참혹한 결과가 초래된다. 작은 차별이 큰 차별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그 차별은 모든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서 시작해서 차별금지법까지 너무 온 것 같다. 차별 금지는 결코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중요한 문제다. 차별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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