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거기에서 무엇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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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거기에서 무엇을 했나?
  • 윤정용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3.08.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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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베니스의 상인>(마이클 래드포드, 2004)은 유대인이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왜 종교적으로 신분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됐는지를 통시적으로 고찰한다. 

종교적인 엄격함을 강조한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고리대금업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하지만 그 일은 사람 사는 사회에서 꼭 필요했고 누군가가 해야만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고리대금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로 유대인들이 담당했다. 기독교인들은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하며 조롱하고 경멸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고리대금업은 금융업이라는 이름으로 질적 변화를 겪었고, 그에 따라 몇몇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자에서 금융가로 신분이 상승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조롱과 경멸의 대상에서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됐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유대인 전체에 대한 집단적인 폭행과 박해가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에는 ‘반유대주의’로 몸집을 키우며 전 유럽으로 퍼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대인 대량학살, 즉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 대한 폭행과 박해의 정점이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잔혹한 사건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47)는 그가 빨치산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파시스트 군대에 체포되어 포졸리 임시수용소로 이송되던 1943년 12월부터 러시아군에 의해 아우슈비츠가 해방되던 1945년 1월까지의 기록이다. 

특히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간의 체험의 기록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예거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인간적 한계를 초월한 극한 상황에서 죽음과 대면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말살된 인간성을 증언했다.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현대 증언 문학’의 고전이다. 그는 자신처럼 수용소에서 살아온 소수의 생존자들은 그 참상을 ‘증언’하고 한 개인만이 아닌 현대 인간이, 보편적인 인간성이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리는 것을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 생각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소수의 생존자들은 인간성이 말살되는 그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증언을 했고 ‘증언 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탄생시켰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학의 대응은 인간성을 소생시키는 인간의 노력이고, 그 결과물인 홀로코스트 문학은 모든 인간의 절대적인 소중함에 대한 증언이자 잠재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경고다.

홀로코스트 문학은 곧 증언 문학이다. 그런데 증언 문학은 전적으로 생존자의 기억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른다. 참상을 겪은 희생자들은 대부분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고통을 재현할 수 없다.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대한 기억을 잃었거나 잊고자 하며 현재의 상황에 따라 변형시키기도 하고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과장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기억에 상상력을 더해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홀로코스트를 바라보는 또 다른 형태의 홀로코스트 문학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홀로코스트 문학이 기존의 홀로코스트 문학의 보완재가 될지언정 결코 대체재는 될 수 없다.

1980년을 전후로 홀로코스트는 기억 산업의 대표 산업이 될 정도로 기억의 대두는 문화 전반에 걸친 현상이 됐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상상의 한계를 넘기 때문에 이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예술가들이 재현하는 게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예술적 재현은 주로 정신적 외상을 겪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이뤄졌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죽음의 순간과 위기의 기록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 생존자들은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로 인한 공포를 견디며 살아가는 동시에 매 순간 그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들 자신의 체험 또는 기억을 언어화할 때 그 서술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종잡을 수 없다.’ 영화 <소피의 선택>(알란 J. 파큘러, 1982)의 주인공 소피처럼 말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루고 있는 <소피의 선택>은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최고로 잔인하고 가장 유명한’ 영화다. 남부 출신의 작가 지망생 스팅고는 브루클린의 하숙집에서 아우슈비츠 생존자 폴란드 여성 소피, 그리고 그녀의 연인이자 유대인인 네이단과 함께 지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 소피의 내면세계는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기억을 네이단과의 성적 관계로 몰아내려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네이단은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미국에 와서 공포로 마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소피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유일한 인물이다. 소피는 네이단 덕분에 관능적이고 활기찬 인물로 변모했다. 하지만 소피가 좋아질수록 네이단은 점점 나빠진다. 그는 편집증적인 조현병으로 비정상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망명자로 취급됐다. 그들은 ‘비굴한 국외자’ 또는 ‘부역자’로 간주됐다. 생존자들은 죄책감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기억을 입으로 서술하지만 홀로코스트는 어떤 형식으로든 궁극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부재한 것을 기억하려’ 하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 하기에 그들의 서술은 파편적이고 종잡을 수 없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난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주변 사람에게 하지 못한다.

소피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아버지가 반유대주의자였다는 사실, 두 아이 중 한 명은 수용소로 한 명은 가스실로 보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스팅고에게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백하며 진실과 마주하려 하지만 그 기억이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스팅고의 사랑 고백과 청혼을 뒤로 한 채 브루클린 하숙집으로 돌아가 네이단과 동반 자살한다.

영화 <소피의 선택>은 윌리엄 스타이런의 동명 소설 《소피의 선택》(1979)을 원작으로 파큘라 감독, 메릴 스트립과 케빈 클라인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평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스트립의 명연기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영화다. 스트립은 극단적이고 절망적인 선택의 상황에 놓인 소피를 처절하게 연기해 처절하게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연극무대에서 주로 활동하여 상대적으로 무명이었던 케빈 클라인도 이 영화를 통해 주연급 스타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처럼 <소피의 선택>은 배우들의 명연기로 기억되는 영화지만 홀로코스트를 재현한 연출 방식으로도 기억될 만한 영화다. 홀로코스트를 다루고 있는 많은 영화들은 아우슈비츠의 잔혹하고 끔찍한 실상을 강조하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을 사용한다. 반면 <소피의 선택>은 카메라, 조명, 음향에 이르기까지 최소한의 촬영과 흑백 화면 등 절제된 영상을 통해 아우슈비츠에 대한 강렬한 효과를 창출한다. 실제로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재현이 다른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지만 영화적 효과는 더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영화적인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영화의 윤리’를 결코 희생시키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소피의 선택》은 나치의 인종 대학살과 미국 남부의 노예 제도 및 인종 차별주의를 인류 최대의 악으로 유비하며 역사극 비극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환기한다. 반면 영화 <소피의 선택>은 나치의 인종 대학살과 그에 따른 소피의 고통스러운 선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대인 소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고국 폴란드에서 나치에게 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녀는 수용소 안에서 나치의 인종 대학살을 직접 목격했고 구사일생으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소피는 유대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을 태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캐한 검은 연기와 냄새를 맡으며 하루하루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극심한 공포와 강제 노동과 굶주림으로 인해 산송장처럼 살았다. 또한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딸까지 포기하며 살려 놓은 아들의 생사마저도 가늠할 수 없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그녀는 더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녀는 군의관으로부터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딸과 아들 중 가스실로 직행할 아이를 고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녀는 그 선택을 고통스러워하다가 한 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결국 가스실로 보낼 한 아이를 선택하고 만다.

영화 <소피의 선택>은 소피의 ‘선택’에 방점을 두기 때문에 소피는 대체로 피해자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 작가 스타이런은 이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한다. 즉 그는 ‘소피가 나치의 극악무도한 비인간적인 범죄의 희생자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에서이긴 했지만, 소피 자신도 나치에게 협조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반유대적인 팸플릿을 작성하고 배포하는 것을 도왔고 나치 저항 세력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수용소에서는 헤스 사령관 관저에서 일하면서 유창한 독일어 실력으로 헤스의 일을 도왔고, 나치가 인종 실험 정책에 자기 아들을 포함하려 하자 그를 유혹하려 했다. 나치라는 거대한 조직 혹은 국가가 저지른 악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소피 자신도 그 거대한 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개인의 나약함과 가족애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소피 자신도 나치의 인종 대학살의 피해자이자 동시에 종범이다.

《소피의 선택》은 역사라는 커다란 수레바퀴 밑에 깔려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 다시 말해 희생양의 모습, 그 역사 속에서 악을 재생산하고 타인에게 위해를 끼치는 가해자인 개인의 모습, 그리고 그 희생양과 가해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두 가지 면을 다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소피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소피의 선택》에서 나치의 인종 대학살만큼 적극적으로 비판되는 또 하나의 인류악은 미국 남부의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주의다. 작가 스타이런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주인공 스팅고는 미국 남부 버지니아 출신으로 노예 제도 및 인종 차별주의에 반대하고 인종적 차이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이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피의 선택》은 소설 쓰기 자체를 주제로 하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사실 주인공 스팅고는 분신이라고 불러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출생 및 성장, 교육, 직업에 이르기까지 여러 면에서 스타이런과 닮았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평등과 관용을 주창하는 아버지를 두었고, 듀크 대학을 나왔으며,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맥그로힐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고, 비눗방울을 불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위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소설 쓰기에 매진했고 흑인 노예 반란을 다룬 소설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작가로 성공했다. 스타이런은 자신과 꼭 닮은 화자를 내세워 고통스러운 창작 과정과 희열과 절망을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혹은 자신이 속한 세대와 국가와 세계가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소피의 선택》을 통해 소설 쓰기와 고통과 기쁨, 홀로코스트와 인종 차별주의라는 역사의 비극을 환기한다.

‘소피의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두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를 일컫는 관용구가 됐다. 《소피의 선택》은 소피를 비롯해 소설 속 등장인물의 선택에 대해 사유를 촉발한다. 소피는 가스실이 보이는 철도 플랫폼에 서서 아들과 딸 중 하나를 가스실로 보내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만일 그녀가 선택하지 않으면 둘 다 가스실로 보내진다. 그녀는 폭력과 마약과 술에 중독된 연인에게 시달리면서 파멸이 눈앞에 보이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지 못한다. 스팅고는 인종 차별주의를 전면으로 비판하는 소설을 쓰려고 하면서도 생활고 때문에 인종 차별주의가 물려준 유산을 받아야만 했다. 아우슈비츠의 군의관 헤스는 목숨을 살려야 하는 의사와 절멸 정책을 총괄하는 수용소 관리자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했다.

악의 희생자나 공범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소피, 스팅고, 군의관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선택이 비록 최선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죄책감을 함께 느끼고 함께 절망하기도 하고, 국가 권력의 횡포 앞에 한없이 무력한 개인의 존재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소피의 선택》은 인류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면서 그 속에서 고통받는 보편적인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 내어 독자의 지적, 감성적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키고 있다. 다른 곳에 있으면, 혹은 다른 편의 입장에 있으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악에 대해서도 무지하거나 무감해진다. 《소피의 선택》은 악에 대해서도 무지하거나 무감해져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면서도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고 거기에서 무엇을 했나?’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다.

윤정용 <문학평론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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