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운명,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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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 운명, 역사
  • 범상스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4.02.2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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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나 갑작스러운 예상 밖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업보(業報)라며, 체념으로 위안 삼으려한다. 이와 유사한 입장에서 ‘운명’ 또는 ‘신(神)의 뜻’이라는 말이 통용된다.

운명의 운(運)은 ‘길 또는 정해진 궤도를 돌다’라는 의미이며, 명(命)은 ‘목숨, 운수, 명령’ 등을 뜻한다. 비유를 들어보면 운전자는 정해진 길을 따라 차를 몰아간다. 이때 운전자의 운전습관과 능력 등에 의해서 어느 정도의 차이는 분명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정해졌다는 숙명론의 범주에 속한다.

이외에도 인간의 삶이 ‘신(神)이나 외부의 어떤 원인’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결정론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크게 두 가지 문제에 대답할 수 없고, 오래전에 논파됐다.

첫째,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어디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결정돼 있음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을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정한 자가 책임져야한다.

둘째, 인간이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여기에 대해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다는 교묘한 논리를 편다. 이것은 결정론 자체를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오류이다. 따라서 운명론과 결정론 등은 인간사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결정해 놓은 자’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기계(최근 AI보다 성능이 떨어지는)에 불과하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운명론(숙명론) 결정론(유신론) 등을 신봉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꿈과 희망을 말하고, 자녀들에게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이중적 모순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반해 업보는 운명이나 결정론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업보는 살아가며 얻은 경험의 영향력인 ‘습관적으로 지속하려는 힘’을 가진 업과, 행위를 일으키는 원인과 결과를 뜻하는 ‘인과응보’의 합성어다. 예를 들면 술을 먹으면[因] 가장먼저 취한 후에 점차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때 취하는 것은 직접적 결과로서 과(果)이고,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부차적[應]으로 따르는 결과로서 보(報)가 된다. 하지만 술에 대한 병폐를 직접경험하고 건강을 잃어 병원에 다니면서도 ‘지속하려는 힘’인 업[業力]에 의해서 빠져 나오기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지로 금주에 성공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듯이 운명이나 결정론처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업보는 우주와 인간사의 통찰로서 현재 처한 모든 상황은 자신의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서 긍정을 제시한다. 그래서 업은 과거 현재 미래 어느 곳에서도 확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어떤 문제로 사이가 나쁜 사람과 만나서 화해를 하는 순간 과거와 미래는 확연히 달라지듯 말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역사는 이미 정해진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아니면 변화 가능한 업(業)일까? 필자는 언제든지 변화 가능한 업이라고 본다. 그래서 E. H. Carr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끈임 없는 대화”라고 했으며, 단재 신채호는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국가의 자존과 정체성, 영속적인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한다.

우리 역사는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에 이어 강제된 친일식민사학,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화과정에서 서구를 받들고 스스로를 폄훼하는 자학적 역사관까지 보태져 국가의 정체성을 흔들고 있다. 최근 가야 고분군이 세계인류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신청 당시 한국의 주류사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를 근거로 ‘가야지방이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기술했다. 이것을 뜻있는 시민들의 고군분투로 일부 막아냈다.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깨트리고 석회를 덧발라 왜곡했고, 그것을 방증의 근거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지배를 획책하고 있고, 식민정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3·1절의 대명사가 된 유관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연구자들에게 던져 본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널리 알려진 유관순의 사진이 있는 수형부의 뒷면에는 ①정동여자고등보통학교생도 ②대정10년(1921)1월 2일 만기 출옥 ③ 신장 5척 6촌 0푼(169.7Cm) ④배경만 다를 뿐 같은 인물과 구도의 사진 2장이 있고, 유관순의 팔 길이는 정상적이 아니며, 신장은 학우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이 자료는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공개돼 있다). 뿐만 아니라 ①일대기를 기록한 사실의 전기가 아닌 유관순전이라는 소설에 근거해 해방 이후 선양사업이 시작됐다는 점 ②선양을 주도했던 핵심인물들의 친일행적이 분명하다는 점 ③3·1운동을 기록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타나지 않다는 점 ④이름 가운데 글자인 관자의 한문표기가 ‘冠’, ‘寬’으로 혼용되고 있고, 호적 등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 등 여러 문제점이 많지만 현재까지 누구도 정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서도 무조건 훌륭하다고만 주장한다.

필자는 유관순과 같은 독립투사가 있었다면 당연히 선양해야 하고,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소설이라 할지라도 교육자료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식민사학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의 가면으로 유관순이 이용되는 것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따라서 눈 밝은 연구자들이 이글을 본다면 이와 같은 의문을 풀어주기를 간곡히 바라며, 3·1절 만세운동의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긴다. 

범상스님 <석불사 주지·칼럼·독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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