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한(卜閒) 성효각(誠孝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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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한(卜閒) 성효각(誠孝碑) 앞에서
  • 구재기 시인
  • 승인 2014.05.0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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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과 함께하는 시로 찾는 ‘너른 고을 홍성’ <43>

 


두 눈을 감으면
너른 세상이 보이지만
두 눈은 뜨고 보면
세상은 눈앞의 그대로일 뿐!
어찌 두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향해 발걸음할 것인가

양 손을 모아
하늘을 향하고, 마음 모아
어버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저절로 보이는 세상
한결 맑아지고 밝아지는구나

두 눈을 감고
생각을 깊이 하면
부귀영화도 한갓 띠끌
머리칼 한 오라기도 소중한
이 몸이 살아 숨쉬고

두 눈을 감아
세상을 바라보기 전에
두 눈을 바로 뜨고
어버이를 헤아리는 마음이사
어찌 세상의 문을 열어갈 것인가
하늘의 뜻에 따름이어니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 211-4에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399호로 지정된 성효각(誠孝閣)이 있다. 이 성효각의 주인공은 효자 ‘복한(卜閒)’이다. 복씨 문중은 또한 효孝의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효를 몸소 실천한 분으로는 복한(卜閒), 복숭로(卜崇老), 복윤문(卜閏文) 선조 분들이 있다. 특히 19세 복한은 부모에 대한 효가 지극하였다. 부모님 병 구완과 관련된 모쟁이(숭어새끼)샘 효자샘(孝子泉) 이야기와 함께 여막(廬幕) 생활로 부모님 3년 상을 치룬 지극한 효성에 땅과 하늘이 감동했다는 이야기들은 여러 문헌 등을 통해 전해지면서 후세에 사람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고 있다.
복한의 효행이 전국에 알려져 조정에서 전국의 효자 10명의 효자첩을 명(明)나라 황제에게 올린 일이 있었는데 명 황제가 이를 보고 복한의 효행은 조선의 효자뿐만 아니라 천하(天下)에 보기 드문 동방(東邦)의 효자라면서 극찬(極讚)하고 조선에 국서를 보내 홍주 여수동에 정려문(旌閭門:孝子門)을 짓고 효자비(孝子碑) 세우도록 하여 효성(孝誠)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1458년은 한국 최초의 효자비가 세워진 해가 되었다.
태종 때에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 여수동에서 태어나신 구암(久菴) 복한(卜閒)은 사헌부 장령을 하였다. 그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기 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고 와서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여, 하는 수 없이 부모님을 서울로 모시고 올라가 사헌부 장령을 하며 살았다. 학문이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몇 년을 사신 뒤에 선생님은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좋겠다 하여 사헌부 장령을 그만 두고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을 모시는 일에만 전념을 하였는데 그만 아버지가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이에 복한은 매일같이 목욕 후에 하늘에 기도하고, 뒷동네에 있는 샘에 가서 물을 떠다가 약을 다려드리곤 하였다.
그런데 그 샘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 보니 집 앞에서 물이 용솟음쳐 오르고 있지 아니한가. 복한 은 그 물로 아버지께 약을 다려 드리곤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성이 지극하여 하룻밤 사이에 샘물이 솟아올랐다 하여 이 샘을 ‘효자샘(孝子泉)’이라고 불렀다.
복한의 지극한 효심으로 아버지는 병이 나아 얼마를 더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뒤에는 어머니가 또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여러 가지 약을 구하여 드렸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갑자기 ‘모쟁이(숭어의 새끼)’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쟁이를 당장에 구할 재주가 없었다. 이리 저리 애를 태우다가 구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하는 수 없이 가까이에 있는 태성산에 올라가 기도를 시작했다. 몇 일 동안 모든 마음을 모아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효자샘에 가 보아라. 모쟁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 않는가. 놀란 복한은 그 길로 자리에서 일어나 효자샘에 가보았다. 아, 그렇게 구하기가 어려운 모쟁이가 헤엄치고 있지 아니한가. 복한은 하늘을 향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는 곧바로 모쟁이를 잡아다가 푹 고아서 어머니에 드렸다. 그 뒤에 어머니의 병은 씻은 듯아 나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효자샘’에 이어 ‘모쟁이샘’이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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