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이네 변기가 고장났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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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네 변기가 고장났대유~”
  • 장나현 기자
  • 승인 2016.03.10 1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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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사는세상- 은하우체국 김항식 국장

“1964년 개관, 면민 사랑방 역할하는 우체국”

“오셨어요? 오늘 표정이 밝으시네요.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여기 앉으셔서 커피 한잔 하세요.”
개똥이네 변기가 고장 난 이야기, 옆집 할머니네 리모콘 버튼이 잘 안 눌러지는 이야기, 뒷집 아저씨네 가스가 떨어진 이야기, 옆 마을 순이네 딸기농사 이야기 등. 자판기 커피를 사이에 두고 김항식(56) 우체국장과 은하 사람들의 이야기꽃이 망울망울 터진다.

은하면은 면소재지가 몇 걸음만 옮기면 다 둘러볼 정도로 번화가가 조그맣다. 면사무소, 보건소, 파출소, 초등학교, 의용소방소, 농협, 우체국 등의 기관이 면소재지에 올망졸망 모여 있고 식당이 한 군데 있다. 면소재지에 흔히 보이는 다방 하나 찾을 수 없다. 은하 사람들은 차 한잔 마시고 이야기 하고 싶을 때면 우체국으로 발길을 돌린다. 업무를 보러 은하우체국에 들르는 사람은 하루 30명 정도이고, 7명은 오며가며 들르는 사랑방 손님이다. 사랑방 손님 중 3명은 하루도 빠짐없이 은하우체국을 들르는 단골이다.

“여기 오시는 분 중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빠지지 않고 나오시는 분이 3분 계세요. 개근상을 줘야 하지요. 한 분은 매일 나오시더니 우리 직원을 며느리로 데려갔어요.” 직원 이혜진 씨는 매일 우체국에 출근도장을 찍는 오광석 씨의 며느리로 출산휴가 중이다. 오 씨는 적의 없이 누구라도 포용하는 김 국장이 형제같이 편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우체국에 온다고 전했다. 

김 국장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발 벗고 나선다. 대천리의 김교인 씨는 6.25때 참전했다가 총탄에 맞아 엄지손가락이 절단됐지만 주민등록초본에 군번이 틀리게 나와 국가보훈대상에 해당되지 않아 혜택을 받지 못했다. 김 국장은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김씨를 도와 대전 병무청에 3번을 동행하며 도움을 주었다. 김 씨의 군번으로 다른 사람이 이미 보훈 신청을 했었던 상황, 다행히도 집안에서 김교인 씨의 군번줄을 찾았다. 김 국장과 김교인 씨는 4번째 대전에 가서 국가보훈병원의 군의관과 면담하고 나서야 보훈대상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은하우체국은 별정우체국으로 현 김항식 국장의 큰 아버지가 지금 우체국 옆 자리에 1964년 개국했다. 그 후 김 국장의 아버지가 1979년에 우체국장을 지내고 김 국장이 1986년 7월부터 우체국을 운영하고 있다. 김 국장은 은하 토박이로 은하초를 졸업하고 광흥중을 거쳐 광천고를 졸업 후 줄곧 우체국 업무를 보고 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우체국 사업도 변해왔다. 1976년 자석식 전화가 은하에 처음 들어왔다. 자석식 전화는 당사자끼리 직접 통화하는 것이 아닌 교환원이 연결해주는 방식으로 8명의 교환원이 근무했다. 1987년 자동화로 바뀌면서 교환원들도 퇴직했다. 1977년 우체국의 금융업무를 농협으로 이관했다.

당시 농협의 운영이 어려워 살려보겠다고 가져간 금융업무를 1978년 다시 우체국이 맡게 됐다. 각 기관단체장이나 직원들이 인사이동을 할 동안 김 국장은 은하를 떠나지 않았다. 은하주민들이 우체국을 찾는 이유도 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 국장이 있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검소한 주민들이 은하의 자랑거리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내포신도시로 떠나고 학생수가 많이 줄어 안타까운데요. 많은 젊은이들이 은하로 오는 게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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