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울과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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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과 펜
  • 이정록 시인
  • 승인 2016.06.2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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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시 -<홍주신문>창간 9주년에 부쳐

나무들이 싹눈을 치켜뜨고 신문제작권을 외친다면
까치둥지를 일곱 개나 품고 있는 은행나무가 좋을까요.
남보다 깊은 어둠에서 푸른 잎을 끌어올리는 갯버들이 좋을까요.
구름을 끌어다가 솜사탕을 꽃피우는 조팝나무에게 맡길까요.
반짝반짝 천 리 먼 곳을 내다보는 미루나무가 좋을까요.
철 핀 이파리로 눈보라 잉크를 찍는 대나무로 할까요.

풀들이 초록 칼날을 휘두르며 언론자유를 달라하면
해충을 잡아먹는 끈끈이주걱이나 벌레잡이제비꽃이 좋을까요.
사막 갈증을 적셔주는 수박이나 오이 넝쿨손에 쥐어줄까요.
무논에 발 담그고 우렁이도 키우는 벼 포기에게 맡길까요.
비밀이야기는 두더지에게 맡길까요, 오소리에게 맡길까요.
우당탕탕 흙탕물과의 외교는 미꾸라지에게 맡길까요, 아니면
아무리 입을 놀려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황금잉어에게 맡길까요.

먼 나라 아득한 이야기는 누구에게 부탁할까요.
강남제비와 기러기의 외신은 그 누가 번역할까요.
별똥별에게는 우주 너머의 소식과 야간경비를 맡기고
새털구름에게는 미세먼지와 바람의 방향을 물어볼까요.
굴뚝연기에게는 여론몰이를 맡기고 해바라기에게는 광고를 맡길까요.
까마귀에게는 궂은 소식을, 까치에게는 편지배달을 맡길까요.

사람에게 처음 저울과 펜이 주어졌을 때
그 누가 그늘 좋은 둥구나무 아래 새벽닭이었을까요.
누가 포충낭(捕蟲囊) 다닥다닥한 물 속 통발이었을까요.
그 누가 꽃이 예쁜 벌레잡이제비꽃이 되었어야 했을까요.
누가 별을 데리고 와서 새끼를 낳는 어미 곰의 굴을 밝히고
그 누가 오소리 새끼들을 깨워 잔치국수를 대접했을까요.
누가 허공에다 수천의 구멍을 뚫는 삿대질을 거둬들였을까요.

어제도 좋고, 오늘도 좋으니, 내일도 좋을 거야! 그 누가
아이들을 무등 태워 여하정 뒤뜰이나 옹암포 갈대밭으로 소풍갔을까요.
웃음소리 왁자한 그림자 밑에 신문지를 깔고 과일과 김밥을 풀어놓을까요.
모심는 소리, 건젱이, 가래질, 아시논맴, 지대기소리,
만물소리, 장원질소리로
써레질을 마친 들판에 푸른 모춤으로 글을 쓸까요.
어러얼 러얼럴 상사리, 헤 헤 헤헤여루 상사리여.


 

이정록 시인
1964년 충남 홍성 홍동 출생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아버지학교」「어머니학교」「정말」「의자」「제비꽃 여인숙」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풋사과의 주름살」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산문집「시인의 서랍」
동화책 「귀신골 송사리」「십 원짜리 똥탑」「미술왕」「대단한 단추들」
동시집 「저 많이 컸죠」「콧구멍만 바쁘다」「지구의 맛」
그림책 「똥방패」 윤동주문학대상 김달진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수상
mojir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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