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어렵고 힘들었어도 따뜻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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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어렵고 힘들었어도 따뜻했지 ”
  • 장나현 기자
  • 승인 2016.08.0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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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열 고택 박계연 할머니
▲ 박계연 할머니.

갈산면사무소 옆에 위치한 김우열 고택에 들어서자 툇마루 밑의 강아지가 목청을 높여 짖었다. 김우열 고택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안동김씨의 고택으로 도지정 민속자료 제10호로 지정돼 있다. 툇마루 위에는 양파가 펼쳐져 있고 방 안과 마당에는 살림살이 등이 눈에 띄었다. 김우열 고택의 박계연(94) 할머니는 기자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눈을 감고 지난날의 추억에 잠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192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서울에 왔다가 할아버지를 만나 서울에서 신혼집 생활을 했다. 당시 무척 부자였던 안동김씨 세력가인 할아버지는 거느린 하인도 많았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서울에서 25살에 내려와 지금의 고택에서 거주하게 된 박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쌀 20가마를 빼앗기고 피난민 20명과 현 고택에 거주하며 풀죽을 6개월간 쑤어먹으며 배고픔을 이겨냈다. 
“부산까지 피난을 다녀오고 집에 도착하니 마루 밑에 창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나왔었지. 그땐 참 고생도 많이 했어. 방바닥에 떨어진 밥풀 하나가 아쉬운 때였어.”

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는 혼자서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고택에 하숙을 쳤다. 당시 갈산초·중학교 교사들과 면사무소 공무원 11명이 할머니의 고택에서 하숙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교사들의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을 짓고 점심 때는 학교로 밥을 날랐다. “아침에 11명의 선생들이 안방에서 함께 식사를 했지. 우리 집에 교장선생님도 하숙을 했는데 교장선생님 식사는 따로 챙겨주었어. 다들 그립고 보고싶네 그려.”

▲ 고택 처마에 마늘이 매달려 있다.

할머니는 50세부터 80세까지 고택에 많은 수의 하숙을 두었다. 고택이 명당이라서 그런지 하숙을 하고 모두 잘 되어 나갔다고 한다. 고향인 대전으로 발령받길 고대하던 교사는 소원대로 대전으로 갔고, 고택에서 인연을 만나 결혼한 교사도 있었다. 22년간 고택에 하숙을 한 소사도 있다. 6년간 고택에서 하숙하던 서용봉 사회교사는 몇달 전 고택에 와서 할머니에게 반가운 인사를 했다. 

할머니가 거주하는 곳은 예전에 광이었던 자리다. 현대식으로 나지막하게 지어진 집에 할머니는 아들인 김우열 씨와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다. 안방에서 살았던 할머니는 다리 힘이 약해 툇마루에 줄을 메어 다녔으나 이도 힘들어서 몇 걸음 걷기 힘들다고 한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 수술을 해 교회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세월이 어떻게 흐른 지 모르겠네. 고향을 생각하려고 해도 잘 생각도 안나고. 그래도 참 추억들이 많아. 한 가족같이 함께 지낸 사람들 그리워. 그땐 어렵고 힘들었어도 따뜻했지.” 언제든 또 놀러오라며 기자에게 손을 흔드는 박 할머니는 손님 차 한잔 못 줬다며 못내 아쉬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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