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광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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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기억
  • 최명옥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3.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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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크고 작은 상처를 경험한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아 있다. 

며칠 전 카카오톡 방에 이상한 문구가 하나 떴다. ‘…당신의 개인 정보를 침해한 것에 대해 화 내지 않기를 바란다’는 글이었다. 무슨 일이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채팅방 나가기’를 클릭했지만 기능이 없었고, 숨김이나 차단 기능도 뜨지 않았다. 두려웠다. 내 이름으로 채팅방에 무단 침입한 사람이 내 방에서 나에게, 그리고 내 지인들에게 무엇인가 요구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30여 년 전 사건이 떠오르면서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나는 20대 때 언니와 서울에서 자취를 했다. 퇴근 후 방문을 열고 불을 켰다. 방은 어지럽혀 있었고, 방 중앙에 칼이 꽂혀 있었다. 온 몸이 공포의 포로가 돼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언니와 나만의 공간은 칼을 꽂아 둔 미지의 타인으로 인해 아수라장이가 됐고, 불안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주인을 설득한 후 안전한 집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많이 팔았다. 그때의 충격일까? 지금도 가끔 집에 혼자 있어야 할 때면 거실 불을 켜놓고 출근하거나, 밤에 불을 끄지 않고 잠을 자는 습관이 지속되고 있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엄마 돼지와 아기 돼지 삼형제에 대한 동화이다. 엄마를 떠난 삼형제는 자신을 위한 집을 짓는다. 늑대가 삼형제의 집을 찾아온다. 늑대는 입김으로 짚더미로 만든 첫째 돼지의 집을 날려버린다. 나무로 지은 둘째 돼지의 집은 몸으로 밀어서 무너뜨려버린다. 하지만 벽돌로 지은 셋째 돼지의 집은 입김으로도, 몸으로도 부수지 못한다. 늑대는 굴뚝을 통해 들어갔다가 끊는 물에 빠진다. 굴뚝을 타고 겨우 도망간 늑대는 다시는 아기 돼지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동화는 튼튼한 집을 짓고 싶은 소망을 품게 했다. 현재, 나는 목조로 된 집에 살고 있다. 어느 정도 안전한 집이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더 안전한 집을 열망한다. 

‘섬광기억’은 새롭고 충격적인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회상이다. 카메라 플래시 전구와 흡사하게 우리가 충격적인 사건을 접할 때의 순간을 정지된 채로 간직한다. 자취방에 도둑이 든 사건은 내 인생의 섬광기억이다. 감정은 의식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서 의식적 노력으로 조절할 수 없다. 이번 카톡방 무단 침입 사건은 과거의 자취방 도둑 사건 때 느꼈던 공포를 내 몸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확인시켜 줬다. 공포는 내 몸에서 반복 재생됐다.

내 몸은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면서 심장이 뛰고, 동공이 커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편도체가 과도하게 흥분해 긴장되고, 예민한 상태를 지속함으로 공포는 한동안 지속됐다. 이렇게 교감신경이 자주 활성화되면 급성심근경색이나 안구건조증, 불안증 등 신체화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지금도 문을 여닫을 때 예기치 않은 사람이 있으면 깜짝 놀라서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 상황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있다.

나는 카톡 계정을 삭제했고, 번호도 변경했다. 10여 년 동안 소중하게 간직한 카카오스토리 방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나의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기억은 여전히 나의 몸에 저장돼 있다. 내 마음의 방이 잠시 흔들렸지만 천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루 이틀 하고 차츰 감정이 안정돼 카톡 무단침입 사건의 원인을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온라인에서 사용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오랫동안 동일하게 사용한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추측됐다. 나의 온라인 집은 마치 첫째 돼지가 지은 지푸라기 집처럼 방어체계가 매우 허술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내 마음의 방, 온라인 집에도 셋째 돼지처럼 튼튼한 방어막을 설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섬광기억이 불러일으킨 공포의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나는 마음속에서 그 사건을 반복해서 생각하고 생각했다. 공포는 정신적으로 소화되면 해소된다. 그 유명한 프로이트의 말, 무의식을 의식화하면 억압된 감정은 해소된다. 나는 이번에 그 말이 진리임을 온 몸으로 경험했다. 카톡 무단 침입사건은 처음에는 공포였다. 과거의 자취방 사건이 떠올라 한동안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경험하고 표현하는 나를 보면서, 내 자신이 심리적으로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코로나19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도 비상사태 시국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우리 마음의 방을 잘 관리해 심리적 면역력을 키워나가자. 
오늘 당신의 마음의 방, 비밀번호를 다시 확인해 보지 않으실래요?


최명옥<한국정보화진흥원 충남스마트쉼센터 소장·상담학박사·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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