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지역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새로운 인식 〈1〉
상태바
홍주지역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새로운 인식 〈1〉
  • 손세제 <철학박사>
  • 승인 2021.12.23 08: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노사이드(Genocide)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민족 혹은 종교적 집단의 절멸을 목적으로 해 자행된 피해 구성원의 살해·신체적 정신적 박해를 뜻한다. 인류 역사에서 확고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소수 집단을 절멸한 최초의 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어난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다.

제노사이드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를 실현할 수 있는 문명의 도구들이 구비됐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르메니아인 학살도 전 국민의 철저한 정신적 동원이 수반됐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론은 이러한 제노사이드의 의식적 연원을 살펴, 이런 불행한 일들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세계의식의 창조가 있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내년 이 주제로 한 인문 강좌를 열고자 한다. 소론은 제노사이드 강좌 개최에 즈음해 강좌를 열고자 하는 이유를 ‘의식’의 면에서 주장한 것이다.

서구 사회의 의식에서 아시아는 오랫동안 자기들의 세계와 내적 연관을 지니지 않는 ‘밖의 세계’로 치부돼 왔다. ‘낡은 세계(그리스)’, ‘노예제가 풍토화된 지역(몽터스키외)’, ‘지속의 왕국(헤겔)’. 이런 말들은 서구인들이 생각한 동양, 아시아 세계의 실상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르크스(K. Marx)에 와서 아시아를 ‘역사의 안으로(서구인들이 말하는)’ 끌어들여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아시아적 생산양식), 그 또한 아시아 세계를 역사의 계기적 발전의 한 단계로 본 것에 불과해[아시아적 사회, 고전 고대제 사회, 중세 봉건제 사회, 근대 자본제 사회, 근대 이행기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마쟈르, 비트포겔 등의 아시아관에 대한 중국, 일본, 러시아 학계의 비판)

이렇듯 아시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서구적 의식에서는 거의 일상화돼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19세기 제국주의의 제3세계 침탈을 이론적 사상적 세계관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일조했다.

일견 이러한 인식은 매우 타당하게 보일 수도 있다. 1840년 ‘서구에의 충격(Western Impact)’이 있기까지 동양 아시아 사회는 외적으로 노예제적 전제주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도 그에 준하는 세계관적 이념적 체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신(魯迅) 같은 이도 《아Q정전》을 써서 동양 전제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의식 일반을 비판하면서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이른바 ‘노예적 근성’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이러한 의식은 이성의 특징인 ‘자유의 실현’을 본질로 한 역사관을 토대로 한 것이기에(헤겔, 《정신현상학》, 《역사철학강의》), 굳이 아시아적 세계 인식을 거론치 않더라도 다양하게 비판될 수 있다. 비록 오늘날의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국체로 택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근대(산업사회)로의 이행 과정에 전근대적 요소가 막대한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을 고려하면(일본에서의 천황제, 한국에서의 근대화, 유교자본주의론), 아시아적 사회를 서구적 의식에 의해 부정적으로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또 과거의 서구 사회의 의식은 동양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인식했지만,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서구학자들이 많다. 따라서 백번 양보해 아시아 사회가 ‘외적으로’ 그런 사회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오늘날의 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근대적 사회 체제를 갖추고 있다.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을 거치며 ‘우연찮게도’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근대사회로 정착해 간 것이다.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