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공원의 ‘대한독립군총사령백야김좌진장군추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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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공원의 ‘대한독립군총사령백야김좌진장군추념비’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23.08.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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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란 땅’ 천년홍주 100경 〈50〉
  • 김좌진장군비(金佐鎭將軍碑)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67호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의 백야공원에 위치한 ‘대한독립군총사령백야김좌진장군추념비(大韓獨立軍總司令白冶金佐鎭將軍追念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7호)’는 일명 ‘김좌진장군비(金佐鎭將軍碑)’로도 불리는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좌진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49년 대한청년단 홍성군단이 성금을 모금해 홍성읍 오관리 412-6 남산공원에 비를 건립했다. 

비문(40㎝×202㎝×40㎝) 뒷면에는 김좌진 장군 일생의 행적이 기록돼 (黃學秀 撰천, 車東日 謹記)있고, 측면에는 1949년 비를 건립했다는 내용과 글씨를 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기록돼 있다. 홍성 오관리 남산공원에 세워져 있던 이 비는 2008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백야장군 생가지에 백야공원이 조성되면서 백야공원으로 옮겨왔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 11월 24일(음력) 홍주목 고남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 성장했으나 문인 집안이자 갈산지역 부호로 어린 시절은 부유한 가정에서 생활했다. 한해 거둬들이는 곡식이 3000석에 달하고, 마을 노복(奴僕)만 50여 호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게 한평생 배고픔 없이 살 수 있었던 김좌진 장군은 조국을 위해 안락보다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억강부약(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돕는다)을 마음에 새긴 김좌진은 1905년 자신 소유의 노비 30여 명을 모아 놓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이들에게 무상으로 논밭을 나눠 준 뒤 상경,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조국을 위해 군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자신 소유의 99칸 기와집에 호명학교를 설립, 근대교육과 민족 계몽운동에 전념했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후 1911년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7년 만주로 건너간 백야 장군은 1918년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 39명에 이름을 올리면서 민족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1919년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이자 사관연성소 소장이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은 1920년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청산리대첩에서 대승을 거둔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26일까지 새벽까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완루구·어랑촌·맹개골·천수평·만기구·쉬구·천보산·고동하 일대에서 일본 정규군 33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힌다. 1922년 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며,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정예사관 양성에 힘쓴다. 같은 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원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다.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에 순국했다. 불혹을 갓 넘긴 41세 때다. 장례는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산시진 신흥촌에서 한족총연합회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좌진 장군의 유해는 부인 오숙근 여사에 의해 일제의 눈을 피해 1934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을 한 이후 1958년 보령군 청소면 재정리에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홍성군에서는 청산리대첩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10월 25일에 맞춰 매년 ‘백야사’에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는 1989년 충청남도기념물 76호로 지정됐다. 홍성군은 김좌진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김좌진 장군 생가 앞에 ‘백야기념관(총면적 4만 7089㎡)’이 들어섰다. 1~2전시실로 나눠 김좌진 장군의 출생부터 계몽운동과 독립운동, 청산리대첩 등 장군의 업적과 전투 당시 사용한 무기 등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김좌진 장군 역사공원 조성사업(6만 4828㎡)을 추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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