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부랑 길·예당호반 한눈에 담는 봉수산 소나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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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부랑 길·예당호반 한눈에 담는 봉수산 소나무 숲길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3.1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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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과 마음의 행복 찾는 숲길 여행 <4>

▲ 봉수산에 올라서면 한 눈에 들어오는 예당저수지와 대흥마을 전경.

백제 부흥군 최후 격전지 임존성 역사의 숨결 오롯해
대흥마을 ‘의좋은 형제’이야기 실제 무대 진한 형제애
소나무 향기 온몸으로 받는 휴양림 등산로 인기 만점


느린 걸음으로 삶과 자연, 역사의 자취를 마주하는 꼬부랑길이 있다. 그 느린 꼬부랑길에서는 물안개가 피어나는 아름답고 환상적인 예당호반이 한눈에 들어오며 장관을 이룬다. 예당호수를 품고 있는 대흥마을은 풍요로운 자연과 더불어 옛 백제시대 성터 둘레의 흔적이 남아 있는 봉수산이 펼쳐져 있어 역사의 숨결이 오롯하다. 우리나라 제일의 저수량을 담은 예당호반은 수자원의 보고다. 상류의 집수면적이 넓어 담수어의 먹이가 풍부하게 흘러들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전국의 강태공들을 부르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아침나절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를 펼쳐 놓은 듯 물과 산과 하늘이 광활한 여백의 아름다움으로 감탄사를 연발케 하며 즐거움을 안긴다. 예당저수지의 면적은 약 9.9㎢이며, 둘레만도 40㎞에 이르고 너비만도 2㎞ , 길이가 8㎞에 이른다. 1929년 4월에 착공해 8·15광복 전후에 잠시 중단됐다가 1964년에 완공됐다.

또한 이곳에는 백제의 혼이 담겨있는, 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 격전지였던 임존성(任存城, 사적 제90호)이 펼쳐져 있는 봉수산(鳳首山,일명 대흥산·484m)이 있다. 1300여 년 전 백제인들이 밟았던 성벽돌이 아직도 옛 아픈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옛 성벽 돌의 자리를 제대로 찾아주기 위해 새로 보수한 2.5㎞에 이르는 성벽 둘레 길을 트레킹하면서는 옛 백제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아직까지도 아픈 역사의 산이다. 이 산은 산세가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봉수산으로 불린다. 예산군 대흥면과 홍성군 금마면 사이에 솟은 봉수산에 쌓은 임존성은 퇴메식 석성이다. 일부 복원된 구간을 제외하면 무너져 내린 옛 성곽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백제 유민의 한(恨)과 투혼, 그리고 배신과 좌절이 겹겹이 서리고 맺힌 성이다.

▲ 봉수산 소나무 숲 둘레길.


봉수산은 높지 않은 둘레길 코스가 아기자기해 심신을 달래는 편안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있고 전망도 빼어나다. 정상에 서면 예당저수지와 예당평야, 금북정맥의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서쪽의 성곽은 최근 복원해 옛 모습이 사라졌다. 동북쪽과 북서쪽의 나머지 구간에서는 무너져 내린 옛 성곽의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임존성은 새롭게 복원해서 오히려 길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듯하다. 백제부흥의 한이 서린 역사의 터전인 이곳에 옛스러움이 사라지니 감동도 쇠락하는 것일까. 복원한 임존성의 계단식 성곽 길을 잠시 오르면 널찍한 잔디밭이 나타난다. 이곳에는 옛 우물터가 발굴됐다. 또 이 근처 성벽 밑에는 ‘묘순이 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사연인즉 ‘옛날 대흥현 고을에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인 묘순이 남매가 쌍둥이로 태어나 살았다고 한다.

그 시대에는 남매쌍둥이 장사가 함께 살 수 없었던 시대로 둘 중 한명은 죽어야 하는 운명이어서 남매는 목숨을 걸고 시합을 했다고 한다. 누이인 묘순이는 성을 쌓고, 남동생은 쇠나막신을 신고 한양에 다녀오는 시합이었다. 그래서 묘순이는 남동생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성을 쌓았고, 이제 성돌 하나만 올려놓으면 성이 완성될 무렵 묘순이 어머니는 한양에 간 아들이 시합에서 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시간을 늦추기 위해 묘순이가 좋아하는 종콩밥을 해서 먹이기로 했다. 종콩밥을 해 거의 먹을 무렵 남동생이 성 가까이 온 것을 본 묘순이는 깜짝 놀라 마지막 바위를 옮기다가 그만 바위에 깔려 죽었다’는 애절한 전설이 깃든 ‘묘순이 바위’가 성돌 밑에 받쳐져 있다. 지금도 묘순이 바위를 돌로 치면 “종콩밥이 웬수다”라는 흐느끼는 듯한 울림의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생각하는 남존여비사상의 대표적인 서글픈 전설이 설화로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 임존성에서 발굴된 우물터.


임존성은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지이자, 백제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성이었다.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무릎을 꿇은 660년, 흑치상지와 의자왕의 사촌 복신, 승려 도침이 임존성에 백제 유민을 이끌고 모여 3년 반에 걸쳐 결사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그러나 결말은 허무했다. 복신·도침·풍왕자의 대립과 유혈극, 흑치상지의 당나라 투항에 이은 역공으로 성은 함락(663년)돼 백제 부흥운동은 여기서 끝이 난다.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전해지며, 삼국유사 등 일부 문헌의 기록으로는 ‘백제의 첫 도읍지’란 주장도 있다. 아무튼 대흥은 600년 전통의 옛 향교와 조선 태종 때 지어진 대흥동헌, 조선 왕족 태실, 흥선대원군 척화비 등 다양한 역사적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진한 형제애를 보여주었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실제 무대가 예산군 대흥면 상중·동서리(교촌마을)다.

예당저수지를 끼고 있는 의좋은 형제마을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이 마을에 살았던 고려 초 이성만·이순 형제의 의좋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형제가 서로 살림을 걱정해 자기 볏단을 몰래 넘겨주다가 만났다는 얘기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다. ‘효성이 지극한 형제는 부모가 죽자 3년간 시묘를 했다. 아침에는 아우가 형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형이 아우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모여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을 담은 비석이 연산군의 지시로 건립됐다. 바로 그 비가 ‘효제비(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02호)’인데 1978년 이 마을에서 발견됐다. 이 비는 조선 초기 양식의 화강암 비석으로 이성만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해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가 기록돼 있다. 효제비는 예당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몰 위기에 처하자 대흥면사무소 앞으로 옮겨져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여정에 각별한 형제애의 의미를 전하며 감동을 주고 있다.

▲ 임존성 성곽과 묘순이 바위.


봉수산은 아래로 대흥마을 전경과 예당저수지가 한눈에 보이는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잘 조성된 자연휴양림 소나무 숲길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게 하는 지혜를 안기는 곳이다. 등산로는 휴양림 쪽으로 오르는 코스와 대련사 쪽 코스, 광시면 마사리 쪽으로 오르는 임도 등 5개 코스가 있다. 마사리 쪽에선 굽이굽이 임도를 따라 차로 성벽 밑까지 오를 수 있다. 성곽 복원 공사장이었던 주차장에서 곧바로 성안으로 오를 수 있다. 이처럼 봉수산은 울창한 산림속에 다양한 시설을 갖춘 산림휴양 공간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져 역사와 문화의 지킴이 역할을 하며 느린 발걸음과 함께 역사문화자원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예산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땅이라면 이제는 충남도청신도시를 함께 안고 있는 홍성의 경우도 백월산과 용봉산을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의 느낌이 있는 쉼터로 개발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홍성읍을 품에 안은 백월산에서 내려다보는 동서남북의 전경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홍성사람들이 홍성의 진산으로 여기는 산, 경관이 아름답고 산행하기에도 좋은 산으로 꼽히지만 아직 행정에서는 관심 밖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임도와 등산로를 보완하고 휴양시설 등을 갖춘 둘레길 등을 조성해 군민들의 휴식처로 개발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숱한 역사적 이야기와 전설 등이 전해 내려오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잘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는 일이 오늘 우리네의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지역의 풍요로운 자연자원을 보존하면서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높이는 주요자원으로 활용, 지역의 발전을 추구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곧 행복운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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