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4>
미완의 대표작을 가진 화가, 오천(吾泉) 이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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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4>
미완의 대표작을 가진 화가, 오천(吾泉) 이환영
  • 장윤수·김현선 기자
  • 승인 2015.05.2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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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대표작을 가진 화가, 오천(吾泉) 이환영

“오늘도 고향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립니다!”

오천 이환영 화백.


오천(吾泉) 이환영 화백은…  이환영 화백은 1945년 홍동면 구룡리 동구마을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홍주초등학교와 홍성중학교, 광천상고를 졸업했다. 교단에서 미술을 가르치다 30대 후반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며, 유천 김화경 화백, 운보 김기창 화백, 혜촌 김학수 화백에게서 사사했다. 77년 제26회 국전에서 입상했으며, 80년 원곡미술상 수상을 비롯해 97년 자랑스러운 충남인상, 2003년 문화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현재 운사회, 후소회,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고향은 어머니처럼 내 마음속에 너무 크고 그리운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고향을 오늘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립니다” 이 말은 오천(吾泉) 이환영 화백이 1989년 홍성에서 열린 제4회 개인전을 꾸미며 한 말이다. 그때로부터 26년이 지나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는 지난 1989년, 2012년에 이어 올해 세 번째로 홍성에서 전시회를 갖는다.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를 인왕산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만났다. “전시회 준비로 요즘 여기저기 답사를 다니고, 공부도 하며 붓을 잡고 있습니다” 부지런히 걷는 그의 발걸음에서 분주한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가 올해 10월 홍주성역사관에서 선보일 전시는 손곡 이달 선생의 시와 생애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시인으로, 당시풍의 시를 잘 지어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로 벼슬은 한리학관에 그쳤다. 말년에 허난설헌과 허균을 가르쳤으며, 저서로는 ‘손곡시집<蓀谷詩集>’이 전한다.

이 화백은 손곡 선생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한 ‘시의도(詩意圖)’ 20여 점을 새로이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이번 전시 준비가 간단치 않은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시 속에 함축된 시인의 생각과 뜻을 그림으로 풀어내는 작업은 문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홍주 이 씨로 손곡 선생의 후손이기도 한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손곡의 문학세계를 새로이 조명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강원도 원주의 손곡리에서는 이달 선생을 기리며 시비공원을 조성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추모제를 열기도 했습니다. 홍주 이 씨 문중에서도 추모제에 함께하기도 했죠. 그런데 정작 그의 고향인 홍성에서는 그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컸습니다”

이 화백은 어렸을 적부터 문중 어른들을 통해 손곡 선생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한시가 어려워 이달 선생의 작품을 제대로 접하지 못했습니다. 후에 선생의 시를 읽으며 언젠가 그림으로 그려보겠노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그는 전국에 있는 손곡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다니고 있다. 서자로 태어나 팔도를 방랑하며 산 그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남아있다. 손곡이 단종을 생각하며 머물렀던 강원도 영월부터, 경기도 여주, 전라도 남원, 충청도 공주까지, 손곡의 채취가 그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기억의 저편 50.5×56cm 순지, 수묵, 채색 1999

 

기억의 저편 56×59cm 순지, 수묵, 채색 1998.

그가 이번 전시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작품은 홍성과 원주의 풍경이 한 폭에 다 담기는 8곡 병풍이다. “지난 2012년 전시한 홍주무진도처럼 홍성 구항면 황곡리와 원주의 손곡리가 모두 담기는 그림을 준비 중입니다. 약 200~300호 정도 되는 대작이 될 겁니다. 이 외에도 손곡 선생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작품은 이미 완성해두었습니다. 또 선생이 팔도를 돌며 당시 백성들이 겪은 어려움을 서사적으로 쓴 칠언절구시인 ‘예맥요’를 재해석한 그림도 어제 막 완성 했습니다”

이 화백은 작품을 준비하며 대상에 대해 철저히 연구하는 화가다. 한 예로 그가 2005년 수원 화성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기까지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수차례의 답사는 물론이거니와 정조와 화성에 대한 역사적 학문적 이해와 더불어 건물의 건축적 특성에 대한 연구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이런 노력은 화성의 유려한 곡선과 더불어 서로 맞물려 쌓아 올려진 돌 하나하나의 질감까지도 화폭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사전조사에 철저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성이죠. 자기 작품에 대한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과정에 진실성이 있어야 해요. 남의 것을 보고 그리거나 가보지 않고 사진만 보고 그리는 그림이 횡행하는데, 그런 것은 진실성이 없는 거예요. 우리 조선 전통미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진실성은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실경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죠. 중국그림을 모사하던 초기의 조선한국미술에서 조선 중기 이후 한국 화가들이 비로소 우리 산하를 보고 그리기 시작한, 그것이 진경이거든요”

그의 작품은 지난해 2월, 겸재 맥 찾기 유수작가 전시회에 초청받으며 명실공히 우리 미술의 실경정신을 이어받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오천 이환영 화백은 평단으로부터 ‘전통 동양화법에서부터 새로운 매체와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는 현대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홍성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을 재해석해 화폭에 담아낸 ‘기억의 저편’ 연작전은 이 화백에게 ‘한국의 샤갈’이라는 칭호를 붙여주기도 했다. 고향에서 늘 볼 수 있었던 소, 닭 등의 동물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화면은 각 대상에 나타난 자연스럽고 풍부한 색감이 방패연의 기하학적 구성방식과 어우러진다.

동양화가로서 우리 미술의 맥을 이어오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표현해온 그에게 그 자신이 말하는 대표작은 무엇일까. 하얗게 센 머리를 가진 일흔 하나의 노작가에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북한산과 서울의 사대문 안 모습을 담은 서울무진도를 화폭에 담고 싶다고 말했다. “산수화는 내 자신이 인격적으로나 작가로서의 능력이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수화를 그리기에 저는 아직 모자랍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작업해온 과정은 산수화를 그리기 위한 습작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죠. 겸재 정선도 인왕제색도를 말년에 칠십이 넘어 그렸습니다. 중국 작가들이 자신들의 유명한 산들을 그린 것처럼, 저도 언제나 마음에 담고 사는 북한산을, 고향 홍성의 월산을 그렸듯이 화폭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북한산을 온 가슴으로 끌어안고 싶어 한 그는 오래 전 거처를 북한산 강북구 수유동으로 옮겼다. 산 가까이서 호흡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계절을 몇 십 년을 경험해보고, 올라가고, 산에 들어가 같이 호흡해야 비로소 어느 한쪽 구석을 그릴 수 있게 되겠죠” 미완의 대표작을 가진 화가 이환영. 그는 “꿈이 있어야 몸은 늙어가도 그 열정은 식지 않는다”고 말한다. “몸이 더 망가져서 이제 정신도 쇠약해져 작업을 할 수 없는 때도 오겠지만 꿈이 있으면 열정과 활력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신다면 화폭에 담아낼 수 있을겁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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