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7>
장곡출신 김구환 광복회서울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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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향인 인터뷰 - 사람이 희망이다<7>
장곡출신 김구환 광복회서울시지부장
  • 장윤수·김현선 기자
  • 승인 2015.07.0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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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곡출신 김구환 광복회서울시지부장
김구환 광복회서울시지부장이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서적을 살펴보고 있다.

 6월의 어느 늦은 밤, 무언가를 가득 실은 지프차 한 대가 광천에 들어왔다. 한 가득 쌓인 그것은 158권이나 되는 책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래돼 보이는 책도 여럿 있었다. 모두 독립운동에 관련된 책들만 한 가득.

과연 이 책은 누가, 어떻게 보내게 된 것일까? 광천읍사무소에 전달된 책들은 김구환(79) 광복회서울시지부장이 보낸 것이었다. 그의 아들이 직접 차를 몰고 광천읍에 책을 기증하고 갔다. 한평생을 모은 책이다. 광천읍은 김구환 지부장의 뜻에 따라 공공도서관에 전달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보이용 및 연구에 보탬이 되도록 할 예정이다. 광복회서울시지부장인 그는 여러 정부부처에서 공직생활을 하다 퇴임 후 1992년부터 광복회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2009년 광복회지회가 설립되도록 법령이 정비된 후엔 선거를 통해 서울 동대문구 광복회지회장으로 선출됐다. 광복회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 유족들이 구성한 단체로 민족정기 선양 및 회원 간 친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서울시지부에는 약 2000명이 회원으로 있으며, 25개 지부가 활동 중이다.
 

독립운동사 관련 서적 약 200권 기증, 지속적 기증 계획
4·7 장곡 만세운동의 주역 김동하 선생의 아들로 태어나
2013년부터 광복회서울지부장으로 민족선양사업 이끌어

그의 광복회 활동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생업으로 공직에 몸담고 있을 때도 독립운동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다녔다. 어릴 적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기록을 찾은 게 시작이다. 김구환 지부장의 아버지 김동하(1892~1940) 선생은 1992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구환 지부장은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더듬었다. “기록을 보면 아버지께서 1919년 4월 7일 가송리 앞산(응봉산, 일명 매봉산) 정상에서 500여 명을 이끌고 횃불을 들었다고 해요. 만세운동이었죠. 그 기세를 몰아 장곡면사무소까지 갔습니다. 면사무소에 갔더니, 직원들은 모두 도망가고 면사무소는 텅 비어있더랍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면사무소는 면민을 위해 있는 곳인데 모두 도망가고 빈집이다. 이런 면사무소는 필요치 않으니 모두 때려 부숴라!’고 말했답니다.” 유리창은 깨지고, 서류는 불태워졌다. 장곡면사무소 습격사건이다. 소식을 들은 홍성경찰서에서 형사와 헌병들이 장곡으로 들이닥쳤다. “경찰하고 헌병들이 총을 쏘고 그랬습니다. 집집마다 뒤져서 만세운동한 사람들 다 붙잡아가고. 그래서 그때 장곡에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갔어요. 그 사람들 가운데엔 광성리, 화계리 사람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우리 경주 김 씨 집성촌이 거기였거든요. 그 당시 500호 정도가 살았다고 해요. 그때는 집안에서 독립운동에 많이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밖으로 이야기가 새나가선 안되니까요. 아버지는 서울로 도망했습니다. 주동자였으니까요.”
아버지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서울로 가고 난 후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홍성경찰서에 붙들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낮에는 경찰서 풀을 뜯으라 하고, 저녁에는 심문을 했대요. 아버지가 어디 갔는지 밝히라고. 나중에 송장 치를 때가 돼서야 경찰서에서 풀어줬다고 해요. 그러고 나오면 한 일주일, 며칠 있다들 돌아가셨어요. 너무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그래서 우리 집안엔 5월에만 제사가 셋이나 됩니다.”

아버지는 서울에 가 조선호텔에 몸을 숨겼다. “조선호텔이 당시 아주 고급 호텔이니까 왜놈들이 거기는 조사를 심하게 하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그곳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외할아버지도 독립운동을 하다 쫓기게 되니 그곳에 피신해있을 때였습니다.” “외할아버지가 고종황제가 계시던 궁에서 경호대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통감부에서 대한제국군대를 무장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했어요. 그때 군인들이 총이 있으니까 일본 놈들하고 전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전력에서 밀렸던 제국군은 패했고, 외할아버지는 도망을 했어요.” 이후 그의 외할아버지 신현대(~1924)는 도망 중 김좌진 장군을 만나 함께 경북 풍기, 대구,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외할아버지보고 김좌진 장군이 ‘당신은 시베창으로 가라’고 했답니다. 시베창은 만주하고 러시아의 경계선이에요. 남시베창, 북시베창이 있는데 외할아버지는 그때 남시베창 부대장을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께서도 중국으로 가 외할아버지 부대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났을 때인데, 혁명군하고도 같이 일본에 맞서 싸웠다고 해요. 그런데 혁명군도 그렇고 독립군도 돈이 없잖아요. 집에 있는 논도 팔고 해서 군자금을 댔어요.”

 

김구환 지부장이 소장하고 있는 독립운동 관련 서적들.

장곡의 지주였던 경주 김 씨 집안은 논밭을 팔아 돈을 마련해 만주로 보냈다. “집안에 한약방을 하는 형님이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하면 그 형님이 가지고 압록강에 가서 아버지를 만나 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싸구려 약을 사가지고 고향에 내려갔어요. 일본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죠. 한약방을 하니 약재를 사러 간다는 명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경찰이 형님의 뒤를 밟았고, 압록강에서 아버지에게 돈을 전달하다 붙들렸어요. 그 형님하고 아버지는 함흥형무소로 끌려들어갔습니다. 형님은 어떻게 나왔는데, 아버지는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됐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조사를 받다보니 고향인 장곡에서 만세운동을 한 기록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또 공주형무소로 이감이 됐습니다. 그곳에서 2년 구형에, 1년 6개월 선고를 받고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형무소를 옮겨 다니며 조사를 받고, 수감되어 있는 동안 서울에 홀로 남겨진 김 지부장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고향인 장곡으로 내려왔다. “큰어머니(김동하 선생의 첫 번째 부인)가 돌아가시고 나서,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께 자신에게 무남독녀 외동딸이 있으니 맡아 달라 부탁을 하셨대요. 그래서 그때 저희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된 겁니다. 아버지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어머니는 시골에 가 풍비박산 난 집안을 돌보셨어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집안은 ‘불량선인’으로 찍혀 온갖 고초를 당하던 때였죠.” 어린 나이에도 그는 ‘불량선인’으로 일본의 감시를 받았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집에 신사가 모셔져 있어서, 아침마다 거기에 대고 절을 해야 했어요. 고등계 형사가 밖에서 절을 하나 안 하나 감시를 해요. 안 하면 난리가 났죠.” ‘불량선인’의 낙인은 학교에서도 이어졌다. “장곡초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당시 담임이 일본인이었어요. 이름도 생각이 납니다. 호시모토라고. 지휘봉 같은 걸로 때리고, 불량선인이라고 욕하고, 벌을 세웠죠.”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나라는 드디어 광복을 맞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는 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 “아버지께서는 광복되기 5년 전쯤 돌아가셨습니다. 수감돼 있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셨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찾아 그는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시작으로 그는 내포지역의 독립운동사까지도 범위를 넓혀나갔다. “시작은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찾는 거였는데, 그 기록을 찾다보니 자연스레 내포지역의 독립운동사까지도 연구하게 됐습니다. 청양, 대천, 은하, 홍성까지 독립운동의 흐름이 이어지니까요.”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책도 수집하게 됐다. “책을 찾으려 전국의 헌책방을 돌아다녔습니다. 이미 절판된 책은 그런 곳이 아니면 구할 수가 없거든요. 이제는 제가 나이 들어 책을 보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책이라는 게 그냥 두면 종이 조각밖에 안 됩니다. 귀한 책들이니만큼 독립운동사연구에 잘 쓰여졌으면 합니다.” 인터뷰 당일에도 66권의 책이 광천으로 보내졌다. 그는 앞으로도 책을 구해 지속적으로 내려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제가 죽고 난 후, 고향에서 독립운동사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책 누가 기증한 건데, 희귀한 자료를 얻었다. 이 책 덕에 연구하는 데 잘 썼다’고 하면, 그거면 족합니다.”
 

 


김구환 지부장은…       
1936년 장곡면 가송리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김동하(金東河) 선생의 아들이다.  장곡초등학교, 광천중학교(4회), 예산농업고등학교, 국학대학교(현 고려대학교 통합)를 졸업했다. 2009년 광복회 서울 동대문구지회장으로 선출됐으며, 2013년 광복회 서울지부장에 취임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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