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학파의 실학과 양명학과 천주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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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학파의 실학과 양명학과 천주교〈3〉
  • 서종태 <前전주대학교 교수>
  • 승인 2021.05.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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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병휴의 문하에서 ‘외주내왕’ 모양의 양명학을 계승한 이기양은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했다. 즉, 양명학에 입각하여 성인의 학문에는 정(靜) 공부가 없고, 경(敬)은 쉽게 선(禪)에 흐르고 격치(格致)는 쉽게 구이에 흐른다고 주장했으며, 《중용》 수장(首章) 미발(未發)의 중(中)에 대해 논하면서 양명학을 바탕으로 정주학을 전면적으로 배척했다. 

이병휴의 문하에 드나들던 권철신도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했다. 즉, 양명학에 입각한 이기양의 《중용》 수장에 관한 설, 성인의 학문에는 정 공부가 없고 경은 선학에 가까우며 주자의 격치설은 구이의 폐가 있다는 학설을 받아들였다. 그가 양명학을 수용했음은 《대학》의 경일장(經一章)에 대해 논한 그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정운·권일신·이가환 등도 이기양·한정운·이병휴 등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했다. 이어 권철신의 문도들이 그로부터 양명학을 계승하면서 양명학은 성호학파 내에 널리 확산됐다.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좌파인 태주학파의 양명학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왕양명의 양명학이나 양명 후학인 좌·우파의 양명학, 그리고 강화학파의 양명학과 달리, 이·기 개념을 가치 세계에 속하는 것과 사실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인식적인 방법도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해, 사공에 관한 학문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점에서, 성호학파의 양명학은 실학적 양명학이라고 할 수 있다.
 

■ 성호학파의 천주교 수용과 전파
성호학파 중에서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이 최초로 천주교를 종교로 수용했다. 이전부터 천주교 서적을 비밀리에 읽고 있던 이벽은 1783년 겨울에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천주당을 방문해 세례받기를 청하고 신앙 실천에 필요한 서적 등을 얻어 오라고 은밀히 부탁했다. 그의 부탁대로 이승훈이 영세하고 신앙 실천에 필요한 천주교 서적 등을 구해 오자, 이벽은 그 책들을 이승훈과 깊이 연구한 뒤, 주변의 친우와 친지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했다. 그 결과 1784년 겨울에 교회가 서울에서 최초로 설립됐다. 이때 교회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권철신으로부터 양명학을 계승한 이벽·이승훈·정약전 등이었다. 이어 천주교는 경기도의 양근·광주·여주·포천 등의 지역과 충청도의 내포와 충주 지역, 그리고 전라도의 전주와 진산 지역 등으로 전파돼 나갔다. 물론 각 지역으로 천주교를 전파하는 일도 성호학파의 실학적 양명학을 계승한 사람들이 주도했다.

이렇게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를 주도한 것은 우선 이익이 성덕학과 더불어 사공에 관한 학문도 아울러 탐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제자들에게 서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점, 서양의 과학기술이 중국보다 뛰어나다고 평한 점, 마테오 리치를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한 점, 서양의 천주의 설은 유학의 상제·귀신의 설과 합치된다고 한 점, 서학의 뇌낭설과 삼혼설을 타당한 것으로 여긴 점, 서양 선교사들을 긍정적으로 평한 점 등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성호학파 중에서도 정주학을 따르는 자들은 거의 모두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만으로는 그 이유를 다 해명할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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