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구박스와 스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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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구박스와 스웨터
  • 전만성(화가, 갈산고등학교 교사)
  • 승인 2010.01.1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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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전만성의 길따라 마음따라

 

▲ 겨울 용봉산. 유화. 162㎝×112㎝. 전만성

 

 

 

우리집 아이가 '수능'을 보고 나서 하는 소리가 우선 '알바'를 하고 싶다는 거였다. 직장을 잡기라도 하는 듯 주민등록 등본을 뗀다, 자기 소개서를 쓴다, 면접을 본다. 수선을 피우고 나가서는 해가 지도록 연락이 없다가 밤이 되서야 전화가 걸려 왔다. 버스를 타려면 2시간을 한데서 기다려야 하니 데리러 와 달라는 거였다. 무슨 일을 밤까지 시키느냐고, 들이는 시간이며 교통비며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다, 투덜대며 눈발이 흩날리는 밤길을 달려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대뜸 불평부터 털어놓았다. 채용도 안 할 거면서 왜 핑계를 대고 시간을 끄느냐는 거였다. 어른은 그렇게 해도 되느냐고 따졌다.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끝내고 내가 했던 알바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드는 거였다. 처음부터 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험도 끝났겠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다가 그 중 한 친구의 제안으로 친구들끼리 나눠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거였다. 때마침 내가 자주 다니는 화구가게에서 손으로 만든 크리스마스카드를 팔고 있어서 갖다 놓으면 팔아 주겠느냐고 여쭈어 봤더니 쾌히 허락해 주셨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일이 순순히 되어갔다.

카드는 갖다 놓기 무섭게 팔려 나갔다. 내가 만든 것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어 밤을 새워 카드를 만들었다. 카드의 양이 많아질수록 내 손에 들어 올 수입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어쨌든 시작한 일이니 크리스마스 날까지는 물량이 딸리지 않도록 대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고 나중에는 색종이만 봐도 진저리가 났다.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며칠 기다렸다가 화구가게로 갔다. 곧바로 가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 보다는 천천히 가는 것이 학생다워 좋을 거라는 생각을 나름 하고 있었다. 화구가게 이모(그 댁 식구들이 부르는 대로 그렇게 불렀다)가 별 말없이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카드를 판 수익금이 든 봉투였다. 그 당장 내 놓고 돈을 세기가 멋쩍어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돈이 기대했던 것보다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계산을 해 보아도 분명 뭔가가 잘못 되어 있었다. 이유나 알아보자고 화구가게에 갔을 때 이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아주머니(이모의 언니)가 나와 잘 모르겠다고만 했다. 방에서 내 말을 듣고 있었는지 이모가 화난 얼굴이 되어 나오더니 7:3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10중 판 사람이 7을, 만든 사람이 3을 가지는 것이 세상 이치라고, 내가 순진해서 뭘 모른다는 거였다. 도무지 대항할 수 없는 기세였다. 어이가 없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허탈했다. 평소 이모와 친하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귀뺨을 한 대 맞은 것 같기도, 뭔가가 깨달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쨋거나 내 손에 들어 온 돈이니 표시 나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산 게 오래 전부터 갖고 싶었던 화구박스와 파랑색 스웨터였다. 화구박스를 들고 나가면 얼마나 폼이 날까. 이제 도시의 학교로 진학을 하면 멋진 옷도 필요 할 것이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첫 '알바'를 추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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