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wall street)의 경고와 반(反)정치의 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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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wall street)의 경고와 반(反)정치의 한국정치
  • 전만수 본지 자문위원장
  • 승인 2011.12.0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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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만수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겸임교수 / 경제학 박사
영화 ‘월스트리트’에서 주인공 마이클 더글러스는 ‘탐욕은 선이다(Greedy is good)’라는 월가의 생존법칙을 리얼하게 연기하여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다. 월가(Wall street)는 세계의 금융허브 거리로 ‘상위1%’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독식구조와 정글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는 미국사회를 지탱해주던 공정(公正), 정의(正義)의 가치가 신뢰를 상실하였음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사건이다.

월가시위(Occupy wall street)는 자본주의 심장부인 미국의 월가에서 발생하여 이목이 집중되었을 뿐이지 자본주의 국가들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5년 전에 발생했던 프랑스의 폭동이나 최근 영국런던에서 일어났던 이민자와 실직청년들의 거리폭동은 월가시위와 연장선상에 있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특정용어로 규정할 필요가 있는 어떤 현상이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대붕괴(Grate Disruption)의 전조이거나 아니면 세계화와 정보기술(IT)혁명이 융합된 ‘대전환(Big change)’의 초기 단계일거라는 주장이다.

변화의 종착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서구적 자본주의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이 겪는 이런 현상의 근저에 비전도 희망도 없는 청년층의 분노가 잠재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기존의 정당체제를 불신하고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새로운 소통으로 결집하는 공통점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아들딸인 이들은 IT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분배과정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월가의 시위는 수차례 변신을 거듭해온 자본주의에 대해 또 한 번의 성찰과 변신을 요구하는 경고다. 대붕괴인가, 도약을 위한 대전환인가, 서구자본주의가 위기의 기로에 서 있다.

월가시위가 상징하는 변화 요구의 근저에는 유행처럼 정치적 리더십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리더십의 위기가 결합된 세계는 정치의 대안을 찾는 반(反)정치의 움직임으로 시끄럽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 실업과 빈곤, 상실감에 지친 젊은이들이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는 칼럼에서 “안철수-박원순 바람의 근본에는 반(反)정치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며 그것은 “한국의 현실정치가 자초한 바람이다”라고 진단한다. “오늘의 정치는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외치면서 사리(私利)와 당략(黨略)만 좇는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가전략도 없이 선거에서 표(標)가 되는 인기영합과 내 사람, 내 식구 챙기기에만 탁월한 수단을 발휘한다. 대통령은 복잡하고 수상쩍은 산술로 퇴임 후에 살 집터를 아들 이름으로 사서 민심 불감증을 드러내고 도덕성에 먹물을 뒤집어썼다”고 꿰뚫는다. 한마디로 실종된 정치와 MB식 ‘공정사회’ 구현은 공정치 못하다는 역설의 질타다.

‘세계의 양심’으로 추앙받는 체코의 전 대통령 하벨은 ‘반(反)정치적 정치(Anti-politika politika)’를 이렇게 규정한다. “반정치적 정치는 권력의 기술을 조작하는 정치가 아니고 인간을 인공 두뇌적으로 지배하는 정치가 아니고 공리와 실천과 책략의 기술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고 지키고 인생의 의미에 봉사하는 정치를 말한다.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 진실에 봉사하는 정치다. 인간적 척도에 충실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정치다” 룰라 전 브라질 대통령의 “정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과 일맥 통한다.

계기야 어찌 되었든 한국정치에 불고 있는 ‘반(反)정치적 정치’ 기운은 희망이다. 이런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는 일등공신은 분명 한국정치의 현재다. 한마디로 정치가 죽었다, 신뢰가 땅 끝이다. 다수결(多數決)의 원칙이나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는 실종된 지 오래다. 여야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표리부동(表裏不同)만을 경쟁한다. 국회본청 앞에 오물을 뿌려도 조건 반사적 미동도 없다. 타협과 소통은 아예 찾아볼 수 없고 현란한 레토릭만 난무한다. 국회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터트려 세계인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국가 브랜드에 먹칠을 했다. 국회의원님들(?)을 소재로 웃겼다고 국회의원이 개그맨을 고소한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인내심이 곤궁하다. 세계사적 변화요구가 IT강국답게 한국사회에 먼저 상륙할 수밖에 없는 정치의 자화상이다. 변화의 매를 먼저 맞겠다는 최소한의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것이 역설적 위안이다.

한나라당은 보궐선거로 한방 세게 얻어터지자 중심을 못 잡고 우왕좌왕(右往左往)이다. 개혁을 표방하는 몇몇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형(刑)으로 백로(白鷺)를 흉내 내더니 잠재권력(?)의 한마디에 슬그머니 꽁지를 내렸다. 젊은 피 수혈이니, 선(先)개혁이니, 환골탈퇴(換骨脫退)니 신장개업(新裝開業)식 설왕설래로 야단법석이다. 10·26보선에서 서울시장 선거패배가 확정된 순간 “아이쿠, 내년에 큰일 났구나 싶었다”는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의 고백은 당초 ‘무승부’라고 우기던 것과 오버랩되어 한나라당의 현 상태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리는 여권의 틈새에 박세일 한반도재단 이사장은 ‘대(大 )중도’를 기치로 신당창당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념의 스펙트럼을 확대하여 좌우를 아우르는 중도정당을 표방하고 있으나 범 보수와 반(反)박 그룹의 대안적 활로 모색이라는 여론이다.

야권은 두 트랩의 정계개편 추진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민주당(대표 손학규)과 ‘혁신과 통합(이사장 문재인)’ 주도로 12·17일 통합전당대회 일자를 배수진으로 소위 ‘중(中)통합’에 가속도를 내고 있지만 반(反)기류가 만만치 않다. 또한 트랩은 지난 11월 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이 소위 ‘소(小)통합’ 진보정당을 창당키로 합의하였다. “총·대선 승리라는 단기 목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추진해야할 중장기 구조개혁까지 염두에 둘 때 진보정당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유시민 국참당 대표의 언급은 어차피 지금은 변방(邊方)이니 차라리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기회를 보겠다는 후퇴전략의 궁색함이다. 나름대로 변화를 위한 부산한 야권 동향이다. 그러나 통칭 범야권은 안철수 교수의 향후 행보에 따라 보따리 장사로 전락할지도 모를 위기 형국이다.

‘자본주의 4.0’의 저자 아나톨 칼레츠키는 월가의 시위에 담긴 변화의 시대정신은 거스를 수 없는 트랜드라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다음단계의 사회발전에 대해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 한다”며 갑론을박(甲論乙駁)을 넘어 좌충우돌 시끄러운 한국사회를 다른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희망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대목이다.

칼레츠키는 “시대 전환기에 나타나는 포퓰리즘적 움직임을 최소화 하려면 정치와 비즈니스 리더들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긍정적인 대안의 비전들을 보여주기 시작해야 한다”고 리더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람직한 복지는 “사회안전망을 제공하고, 사회소수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시행하는 것이 좋다”며 “보편적 복지를 제공하느라 국가를 장기적 비용에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반(反)정치적 정치’ 문화가 역동의 레이스에 들어선 작금의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금과옥조(金科玉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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