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끝나지 않을 계단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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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끝나지 않을 계단일지라도
  • 한학수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1.16 09: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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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그 상대가 친구이든 적이든 정의로운 자가 할 일이 아니고, 정의로운 자의 반대편에 있는 나쁜 자가 할 일이다”라고 소크라테스는 일갈한 바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그의 생각에 아주 반(反)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한국의 경우 갈등수준은 높고, 갈등을 관리하는 역량이 현저히 낮은 게 문제다. 국가의 성패는 누가 갈등을 잘 풀어내느냐에 달렸다. 갈등관리에 실패해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갈등을 토대로 도약할 수도 있다. 등 대고 대립할 것인지, 마주보고 얘기해볼 것인지, 나를 고민하고, 너를 인정하며, 시대의 소명에 따라야 할 일이다.

우리가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 속에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숱한 갈등을 해결하며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런 측면에서 갈등은 발전의 ‘성장통’이다. 독일의 정치인 발트라우트 볼프는 격렬한 갈등을 봉합한 합의의 기술로 ‘토론과 공론화를 통한 투명한 정보공개’를 꼽았다.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주장을 펼치면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고, 오히려 갈등은 더 깊어진다. 늘어나는 갈등비용도 부담일 테고, 우리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면 내편 논리 외에 다 반대편으로 보인다. 설령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더라도 좋은 길잡이가 있으면 길 가기가 수월할 테다.
 
5년 대통령 단임제인 우리나라의 정치구조는 장기적인 비전을 고려한 정책보다 임기 내에 실적을 낼 수 있는 일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많은 갈등을 ‘공권력’이라는 국가폭력으로 해결해왔다. 갈등의 ‘해결’이라기보다 ‘억압’으로 또 다른 갈등을 양산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과 건강한 젊음이 자양분으로 쓰였다. 역사의식 없는 후한무치의 타락한 정치인들이 씌운 프레임에 걸려, 갈팡질팡하는 민중은 요즘도 광화문으로 갈까, 서초동으로 갈까 망설인다. 다수의 정치인은 겉으로는 민주(民主)라고 외쳐대지만 속내는 민졸(民卒)로 보고 선거 때 표수로만 본다. 대중은 즐거워도 속되지 말며, 슬퍼도 비탄에 빠지지 않아야 할 일이다.

인생의 짐은 많을수록 불편할 뿐이다. ‘배려’는 타인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승리하는 삶만이 인생이 아닐 것이다. 이기는 것보다도 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승리일 수 있을 테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다,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앞선다. 조선 시대에는 서로 얼굴 안 보고 결혼해도 잘 살았다고 한다. 이 시대는 시집가고 장가가면 좋은 일이 생길까 서로 기대하고 가다보니 삐걱거리기 일쑤다. 에디슨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같이 한두 명 천재의 출현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힘을 합해서 하나의 큰일을 이루는 공감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이 시대는 전문지식에다 다른 분야에 대한 상식과 포용력도 요구한다. 미래는 실용주의와 인본주의가 만나 새롭고 거대한 물결이 되는 시대다. 현상을 넘어 본질을 알려면 그와 연관된 것들을 찾아내 문제를 전면적으로 봐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에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Nowhere(아무데도 없다)’에서 스페이스 바 하나만 치면 ‘Now here(지금 여기에 있다)’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치의 변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창조하는 자의 변화를 의미한다.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지금껏 우리의 맥박은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한학수 <청운대 방송영화영상학과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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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 2020-01-17 13:19:45
now here이라는 글귀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느끼는 글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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