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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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 이원기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01.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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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독일의 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접 ‘겨울 나그네’에 관한 얘기도 아니고, 그 시집에 실린 42편의 시들 가운데 제1부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제2부 ‘겨울 나그네’를 각각 연가곡 형태로 작곡한 프란츠→슈베르트에 관한 얘기도 아니다. 글 제목을 ‘겨울 나그네’라고 한 것은 그럴 까닭이 있어서다. 외젠 이오네스코 작 ‘대머리 여가수’는 극이 끝날 때까지 대머리 여자 가수는 코끝도 안 비칠 뿐만 아니라,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대머리 여가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대참사였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살풍 경한 인강 실존과 ‘생의 부조리’를 새로운 작극술로 보여줌으로써, 현대 부조리극의 효시로 불리운다. 

또한 비슷한 무렵에 쓰여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드라마는 채플린의 무성영화 ‘방랑자’에 나오는 채플린같은 행색을 한 두 명의 방랑자가 해질녘에 행길에서 고도(godot)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2막으로 된 이 드라마의 각 막 끝부분에 이르러서야 기다림에 지친 두 방랑자 앞에 웬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못오시지만 내일은 꼭 오신대요’라는 말을 전하고 떠난다. 사노라면 어딘가 기댈 데도 필요하고, 정해놓은 목표가 실현되기를 기다리노라면 힘든 시기를 무사히 견뎌낸 끝에 꿈이 실현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인데, 기댈 곳도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나 꿈도 없는 사람이라면 절망 밖에 더 있겠는가!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라 하여 이른바 인종차별정책을 편 소수 백인들에게 절대다수의 흑인들이 심한 압박에 시달릴 때 인종차별 정책에 대해 몸으로 저항했던 연극 ‘아일랜드’에서 석방 날짜를 알게 된 존이 자기 전에 기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채 담요를 뒤집어쓰고 출감할 날짜를 꼽아보다가 감방 동료인 종신 징역수 윈스턴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자 존은 미안한 나머지 종신형수 윈스턴을 위로하려드나 윈스턴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목표고 정치고 다 꺼지라고 해! 친구여! 나 좀 도와줘! 존! 내게도 열 개의 손가락이 있다고! 나는 뭘 셀까? 응? 나는 뭘 세어야 하지?” 

물론 극중 인물 윈스턴보다도 더 절망적인 처지에 빠진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2001년 9월에 대학로에서 공연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던 고연옥 작 ‘인류 최초의 키스’에서 50세의 수감자 학수는 모범적으로 수인생활을 해온 덕분에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를 받는데 예상과 달리 가석방 불가 판정을 받자 똥을 먹기 시작한다. 똥을 똥인 줄도 모르고 먹는다면 이미 정신마비 된 것이고 그 원인은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희망찬 경자년 새해가 밝았다. 다들 지난해보다는 나은 올 해가 되기를 간주했겠지만 집안 사정, 나라 사정, 세계정세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어 보인다. 게다가 날씨마저 겨울다운 맛도 없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도 상쾌 신신한 것이 없으니, 엉겁결에 패딩처리 된 외투를 입고 호기롭게 집을 나서지만 우리네 서민들이 삶이라니! 춥고 배고프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갈 이유도 없이 황량한 들판을 헤매는 찬바람 부는 생의 들판을 헤맬 사람들을 생각하며 위로를 드리는 마음으로 기형도 시인의 마지막 시라고 알려진 시를 올려본다.

빈집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작>

1962년 생 기형도 시인은 서른도 채 안된 나이에 어느 삼류 심야극장 구석진 객석에서 세상을 하직했다고 한다. 죽기 일주일 전 쯤 “나는 뇌졸중으로 죽을지도 몰라”라고 말했다던 그의 사인은 실제로 뇌졸중으로 추정됐다. 

이원기<청운대학교 교수·칼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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