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에 이어 ‘새’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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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에 이어 ‘새’마을로
  • 김옥선 칼럼·독자위원
  • 승인 2020.11.2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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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에 열일곱 식구가 복작댄다. 집에 우물이 없으니 십리 길을 걸어 물지게에 물을 길어 날랐다. 리어카 한 대조차 없어 읍내까지 나갈 때는 지게에 한 짐을 싣고 고개를 넘어 다녔다. 겨우 두 사람이 교대로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흙길이다. 마을 회의를 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모두 모일 공간이 없어 남의 집 사랑방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1960년대 농촌사회 대부분의 모습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주도한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기 전 1932년 농촌진흥운동이 시작됐다. 김영미가 쓴 ‘그들의 새마을운동’에 따르면 1932년 우가키 가즈시계 조선 총독이 농촌진흥운동의 취지와 방침을 밝히며 시작된 농촌진흥운동은 농민들이 자각과 자력으로 경제 갱생이 가능하다고 선전하면서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참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농촌진흥운동 초기에는 개별 농가 지도를 중심으로 전개했고, 전국 행정망에 따라 수행 조직으로 농촌진흥위원회를 구축해 각 면에 1개의 지도마을을 뒀다. 1935년 확충기에는 전 마을과 전 농가로 확대하면서 마을지도자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동회, 동계 등의 자생적 주민조직이 마을진흥위원회에 흡수됐다. 이후 1958년 지역사회 개발사업 요강을 대통령령으로 공포하고 각 지역에서 시범마을을 정해 교육받은 지도요원들이 투입됐다. 농업기술 지도, 사회복지, 보건위생 환경 개선, 부녀자 지도 등이었다. 사업은 1958년 12개, 1959년 109개, 1960년 260개로 확대됐다. 1962년 농촌진흥청에 흡수되면서 이 사업은 끝나게 된다. 

1966년 농촌진흥청은 부락민 자조개발 6개년 사업을 실시한다. 전국 3만3000개 마을을 대상으로 지원사업과 자조사업을 추진하도록 했다. 전천후 사업, 경지정리, 지력 증진, 재배 기술개선, 재해대책, 임업, 농기구, 토목건설, 농산물가공시설, 공동이용시설 등 10개 영역이었다. 그러나 자본과 기술 부족 등의 이유로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1970년 박정희 정부는 자생적 지역발전의 사례를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바로 전국적으로 실행된 새마을운동이다.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주민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업 수행 성적에 따라 기초마을, 자조마을, 자립마을로 구분해 대통령 하사금과 함께 지원금을 받았다. 이는 마을에 따른 지원에 차별을 둠으로써 주민들을 분발시키는 효과를 누리기도 했다.     
1970년대 진행된 새마을운동은 농촌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 두 명이 겨우 교차해서 지나갈 만큼 좁은 농로가 포장되고, 매년 보수해야 했던 초가집이 하늘색과 빨간색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돼 농촌사회를 대표하는 풍경이 됐다. 슬레이트의 유해한 성분으로 인해 논란이 분분하지만 그 당시로써는 최고의 자재였던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상습적 물 부족을 겪었던 농촌에 지하수가 개발되면서 농사를 짓고 살기에 불편함도 해소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민간신앙을 무속신앙이라 여겨 타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 각 마을 단위의 전통신앙과 문화들이 사라져가기도 했다. 협동·단결이라는 신조 아래 사업이 진행됐지만 마을 리더의 밤낮 가리지 않는 희생과 주민들은 단순히 마을 부역에 동원되는 과정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운동이 농촌사회에 변화를 가져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 시절 모두의 요구는 어쩌면 동일했다. 그래서 낡은 마을을 ‘새마을’로 바꾸는 새마을운동이 가능했다. 지금은 새마을이 아닌 ‘새’ 마을이 필요하다. 고령화돼가는 농촌과 자급자족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새’ 마을 말이다.

 

김옥선<홍성군마을만들기지원센터 팀장·칼럼·독자위원>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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